거인의 정원/최형심
나는 거인에 속해 있었다. 니체가 거인을 죽인 후, 20세기적 고통으로 더는 그를 정의하지 않는다.
칠월이 해바라기 밭을 지날 즈음, 한 줌의 머리를 잘라 거인을 추억한다. 촉촉한 실비가 이른 새벽을 걷어 가면 천장이 낮은 집 지붕 밑 그늘까지 하얗던 나날들. 잠자리가 그려 놓은 나른한 하늘 아래 초록거미의 여름이 엄지발가락에 닿곤 했다. 익명의 이별을 위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간이역이었던 곳, 문득, 푸른 스카프를 두른 여장사내가 기억을 놓친다.
겨울이 드나들던 자리에서 한여름 한기에 발이 젖는다. 샛노란 레몬 달이 뜨면 신물나는 세상을 뒤로 걷는 사람들, 온몸을 흔들어 제 안에 쌓인 고요를 휘젓는다. 허기의 무늬가 둥근 파문을 일으키면 지난 밤 만났던 꽃의 이름을 더는 묻지 않는 풀벌레들이 작은 귀를 떼어낸다. 밤이 한 방향으로 몰려오고
나는 내부로 들어가 공명한다. 너무 많은 사랑이 나를 죽였어. 콧등을 덮은 불빛에 얼굴을 잃었다. 살별을 벼리다 위험한 저녁이 내게 이르러서였다. 지금은 뼛속에 묻어둔 그 이름을 꺼내어 닦아야 할 때, 비망록을 꺼내 들며 타는 갈증으로 키 큰 해바라기 목을 친다. 꽃대롱이 떠받치던 하늘이 성큼, 비가 되어 쏟아진다. 어둠이 비에 쓸려 바닥에 고인다. 이제, 그 어둠을 찍어 거인에게 편지를 써야 하리. 나는 오랫동안 절망을 만졌으므로 조금도 절망하지 않겠다.
― ‘현대시’ 9월호
[출처]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최형심|작성자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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