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현대시 작품상 추천작

주선화 2009. 12. 21. 16:17

석불여래좌상에게 쓴다/박미라

 

 

 

  들키기 위해서 나선 길이다

 

  이게 나야 내 얼굴이야 눈썹을 그리고 코를 풀고 이빨을 닦으면서 작은 꽃밭 가꾸듯 정 붙이고 살았는데

  거울을 보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내 꽃밭을 헤치고 불쑥 솟아나 한참씩 울먹이는 그대를 숨기고 사느라 나는 늘 숨을 헐떡인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는 그대를 세상천지에 대놓고 들켜버리려고 나선 길이다

 

  누가 봐야 할 텐데 저것들 기어이 만나고야 만다고 허긴 기다림을 당할 게 천지간에 있겠느냐고 모두 수근거려야 할 텐데

  천 년쯤은 찰나라고 우기며 솜털 하나 변하지 않았다지만 오른쪽 넓적다리 움푹 파인 걸 보면 밤마다 무릎걸음으로 헤매는 게 분명해

 

  여기 그대의 목을 가져왔어 오늘은 꼭 돌려줄 거야 다시 나를 부려 세상을 보려 하지 마 그대가 본 것을 내가 봤다고 착각하게 하지 마

  나는 이제 무서워 그대의 목이 내 가슴까지 뿌리를 내렸어 더 망설이다가 나는 통째로 먹혀버릴 거야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돋아나는 그대의 목을 나 세상에 들켜버리고 말 거야 꾸역꾸역 피를 토할 거야 내 몸에서 올라오는 피를 그대 목으로 토할 거야 마음이 정한 주인은 마음의 것일 뿐 이름이야 없어도 그만이야

 

  그대 목을 돌려주고 나 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갈 거야 마음에 머무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 끄덕이며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기를

 

  먼지 풀썩이는 맨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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