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어느 구두 수선공의 독백에 부쳐 / 문성해

주선화 2020. 8. 24. 09:01
어느 구두 수선공의 독백에 부쳐
ㅡ 문성해


나는 발목이 없는 세계를 만지는 사람
이것은 얼마나 조용하고 완변한지!
이 위에서 얼마나 많은 혼잣말과 원망과 침과 오물과 음식이 자행되어 왔던가
얼마나 많은 왕궁과 댐이 건설되었던가
이 위에서 우주선과 3차대전과 정상회담이 떠들썩했다고 하기에
이것은 너무나 찌그러져 있고 하잘것없어 보인다

들끓는 피톨들과 움푹한 정강이뼈를 이 위에 앉히고
평생을 사는 직립의 허깨비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조이고 닦고 벗기고 사포질한다
언제든 맨발로 달아날 수 있도록 헐렁한 슬리퍼를 신고,

점심시간이면 몰려와서 삼선 슬리퍼 속에 꽂히는 유순한 발목들을 향해
나는 구두약과 본드를 들어 보이며 우스꽝스럽게 말한다
"10분만 기다려주세요. 당신들의 완벽한 발굽을 위해!"
그러면 그들은 갑자기 초식동물이 된 양 메에에, 웃는다
흰 이빨의 세계가 저토록 천연덕스럽다니!

나는 발목이 없는 세계에 이토록 공을 들이는 게 좋다
내가 하루 종일 침 바르고 애지중지한 이 속으로
각다귀처럼 떠들썩한 세계가 들어와서
증시장이라든지 시장통이든지 자살사이트가 기다리는 피시방이든 대통령 취임식이든지 어디로든 흩어져 간대도 나는 도무지 궁금하지가 않다
내게는 다 달그락거리는 해골들의 각축장일 뿐,

나는 지게차 한 삽 거리도 안되는 상자 속에서
하루 종일 냄새나는 세계를 얼굴 가까이 댄 채 덧대고 두드린다
그러면 이 세계는 내게 조용히 열어주는 것이다
조이고 덧대기 이전의 가죽의 세계를,
그 풀씨 흩날리던 되새김질의 노래를,
그 속은 언제나 조용하고 황홀하고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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