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장미의 세계 / 서영처

주선화 2020. 9. 2. 22:10
장미의 세계
ㅡ 서영처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장미
울 때마다 송이송이 향기를 품어내는 장미
갓 태어난 장미에게 우유를 먹이는 동안
허벅지를 찍고 등으로 기어올라 잠 속을 기웃거리는 장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장미는 혀를 내밀어 내 눈물을 핥았다
가시 돋힌 팔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골목을 지나 다시 생의 여름이 온다고
자꾸만 옆구리로 터져나오는 꽃들
야옹, 울 때마다 장미가 피어난다
생선을 발라먹고 가시를 토해내는 장미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장미

끝없는 갈림길이 있는 정원에서
계속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황량한 세계에 닿았다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 가시 돋힌 말을 밷어내는 장미
입안에서 벌떼가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눈시울 위로 타오르는 장미
그 많은 눈시울 아래로 잠드는 무덤
기억의 지층 아래 묻힌 쓰레기를 파내 장미를 접는다
악취를 풍기는 장미
담벼락마다 장미가 피어오른다
돌연 줄을 풀고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해마다 넌출넌출 새끼들을 물고 오는 장미, 망각의 장미


비단길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초원이 펼쳐진다
인도에서 온 것 같은 서커스단이 방울을 울리며 지나간다
상인과 나그네, 걸인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 따라간다
두 번째 서랍을 열자 읽히고 읽혀 표지가 떨어져 나간 책이 나온다
책장을 넘기자 노상강도가 덤불숲으로 숨어버린다
잠 속으로 먼 길이 반짝거린다
대륙은 길들을 겹겹이 허리에 두르고 모래 실은 구름을 띄운다
이따금 옆구리에서 길이 흘러내린다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이지마다 창궐하는 도시
영원으로 이어지는 굽이마다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불면을 달래줄 신기한 약을 팔고
비단실처럼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 소절의 노래가 사라진다
세 번째 서랍을 연다
하늘에 묻은 뼈들이 인광을 뿜으며 깜박거린다
큰 새가 나를 물고 세상의 많은 도시 중에 하필 이곳에 나를 떨어뜨린다
서로를 모른 채 콘크리트 빈칸을 가득 채우는 사람들
밤이면 수만 가지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도시 위로 박쥐 떼가 날아든다
네 번째 서랍을 열자
해와 달이 큰물을 휩쓸고 간 황야로 나를 데려간다
맹인 악사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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