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의 얼굴
ㅡ 송은숙
숲속에서 만난 키 큰 소나무 가슴께가 꺼멓다
나무의 내부로 들어가는 심연의 통로 같다
번개가 온힘을 다해 들이받은 통증
그러니까 저 불의 인장은 번개의 얼굴이라 하겠다
나무의 내부를 훑고 번개가 들여다본 건
수십 수백 개의 방
수백 수천 갈래의 뿌리
두 손을 모으듯, 손가락 끝을 포개듯
저 뿌리와 제 몸을 섞고 싶었을 게다
뿌리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을 게다
그날, 번개가 지나갔다
번개를 맞은 나무는 오래 청정하고
번개를 맞은 사람은 목덜미에
리히텐베르크 무늬*를 새겼다
우주의 에너지를 탐욕스레 흡입하는 붉은 흡관
번개가 제 몸을 복사한 흔적이다
저 문양을 닮은 것은 번개의 일족
질기게 뻗어가는 나무뿌리와
만년설에서 시작된 강의 시원이나
촘촘히 나뭇잎을 갉아먹는 민달팽이의 걸음
그날, 무엇에 놀란 듯 마구 달려가던 고양이의 울음
번개는 검고 푸르고 희거나 솟구친 귀처럼 팽팽하다
* 번개를 맞은 사람 몸에 남은 번개를 닮은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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