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ㅡ 조정인
리스본의 당신은 여전히
오늘의 눈송이가 불어오는 곳
어떤 필자는 부지불식간 독자를 불러 세운다. 바닥없는,
젖은 손바닥을 목덜미에 놓는다.
책을 읽다가 한 페이지 깊숙이 접게 되는 거기, 한 단락 문장이
검은 탕약처럼 엎질러져 있는 경우.
발 없이 방으로 들어서서 없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혀 없이 혀를 감는, 환하게 불 켜진 심장으로 아득히
초원이 펼쳐지고, 흰 망초 무리가 들어서는
문장이 하는 이런 일들.
그날 밤, 책의 한 페이지를 깊게 접은 나는 책을 떠나 창가 쪽으로 갔다.
한 세기 전에 죽은 자가 한 말은 놀랍게도 어느 봄날, 당신이
고백의 휘발성에 대해 흘린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죽은 필자의 영혼은 어떻게 시공을 되돌려 이곳, 익명의 독자에게 돌아와
밤의 밀서를 건낸단 말인가.
백 년과 백 년 사이, 별처럼 총총한 창문들.
그리운 무수한 당신들이 창가에 있다.
수세기 바깥 누군가의 한밤의 나를 따라 한다. 읽던 책을 덮고
창 유리에 이마를 댄다, 두 번, 마른 기침을 하고 식탁으로 돌아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의 등 뒤, 검은 유리창에
흰 눈송이의 소요가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마치 오늘 내가 배회하던 문장들의 혼령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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