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 조정인

주선화 2021. 7. 1. 11:25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ㅡ 조정인

 

 

리스본의 당신은 여전히

오늘의 눈송이가 불어오는 곳

 

어떤 필자는 부지불식간 독자를 불러 세운다. 바닥없는,

젖은 손바닥을 목덜미에 놓는다.

 

책을 읽다가 한 페이지 깊숙이 접게 되는 거기, 한 단락 문장이

검은 탕약처럼 엎질러져 있는 경우.

 

발 없이 방으로 들어서서 없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혀 없이 혀를 감는, 환하게 불 켜진 심장으로 아득히

초원이 펼쳐지고, 흰 망초 무리가 들어서는

 

문장이 하는 이런 일들.

그날 밤, 책의 한 페이지를 깊게 접은 나는 책을 떠나 창가 쪽으로 갔다.

한 세기 전에 죽은 자가 한 말은 놀랍게도 어느 봄날, 당신이

고백의 휘발성에 대해 흘린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죽은 필자의 영혼은 어떻게 시공을 되돌려 이곳, 익명의 독자에게 돌아와

밤의 밀서를 건낸단 말인가.

 

백 년과 백 년 사이, 별처럼 총총한 창문들.

그리운 무수한 당신들이 창가에 있다.

 

수세기 바깥 누군가의 한밤의 나를 따라 한다. 읽던 책을 덮고

창 유리에 이마를 댄다, 두 번, 마른 기침을 하고 식탁으로 돌아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의 등 뒤, 검은 유리창에

흰 눈송이의 소요가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마치 오늘 내가 배회하던 문장들의 혼령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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