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산
ㅡ백윤석
후드둑 빗소리에 대합실이 다 젖는다
쉼 없이 비를 털며 들락대는 사람들 속
척추 휜 우산 하나가
구겨진 채 나뒹군다
한때는 온몸으로 빗줄기를 막던 그도
살대가 부러지면서 하염없는 잠에 빠지고
노숙의 차디찬 빗소리
꿈결인 듯 듣고 있다
일순, 그 안에서 꽃대 하나 일어선다
성긴 꽃 잎눈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비 듣는 세상 밖으로
무릎걸음 걷는다
ㅡ서평 (이서원 시인)
대합실이 다 젖을 만큼 세찬 비바람이 들이친다. 거기에 척추가 휜 우산 하나가 구겨진 채 나뒹굴고 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냥 바쁜 사람들이 오갈 뿐이다. 무심한 사람들 속 젖은 우산은 더 애잔하다. 멀쩡한 우산도 아니고 척추가 부러진 우산은 갈 길을 모른 채 나뒹굴고 있다. 한때는 식솔을 위해 온몸으로 비를 막으며 버티던 세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어찌 살다가 다 부러진 채 이 모진 풍파의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였을까. 차디찬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우산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아픈 가장이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 시대와 결코 무관치 않은 IMF를 건너오면서 그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여태 건너고 있다. 밖은 비가 연신 쏟아진다. 그런데 살대도 척추도 다 부러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가장이 다시 기어가 본다. 결코 여기서 쓰러져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 없다. 성긴 꽃잎 눈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의지를 드러낸다. 비 듣는 세상 밖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우산을 씌어줄 사람은 없다. 비를 피할 공간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간절한 눈빛을 겨누던 세상 밖으로 오체투지 걷는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비가 온 뒤에는 분명 맑게 갠 하늘이 오는 법이다. 그 가장의 어깨 위로 새 희망의 빛이 곧 비치겠다.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이불을 덮고 / 나희덕 감상 / 박준 (0) | 2021.12.24 |
---|---|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감상 / 박성우 (0) | 2021.12.17 |
부뚜막 / 박철 감상 / 문태준 (0) | 2021.12.12 |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 김추인 감상 / 박미산 (0) | 2021.12.10 |
커브 / 신현정 감상 / 문태준 (0) | 2021.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