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집 한 채 / 김경인

주선화 2022. 10. 28. 09:00

집 한 채

 

-김경인

 

 

잠이 들면 어디선가 삽 하나가

나를 푹 떠서 데려다 놓는다

가느다란 핏줄을 닮은 

서리 낀 유리창 너머

나 어릴 적 엄마아빠가

고장 난 시계 종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거기

나는 지하실보다 어두워져서

어린아이처럼 뛰노는

마당가 햇빛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집은

커다란 비닐하우스처럼

무럭무럭 부푼다, 나는 잘 익은

꽈리 빛깔로 열린 단어 몇 개를 따서

바구니에 넣는다, 모르는 척,

떨어져 썩은 엄마아빠도 

주워 담는다, 집이 늘어뜨린 어둔 넝쿨에 감겨

내가 구물구물 더 깊은 꿈에 빠지면

누군가 삽으로 나를 깊이 떠서 잠 밖으로 퍼낸다

다시 보니 늙은 오이다 나는

쓸모없는 날들을

으스러지도록 꼭 짠다, 채칼로

그림자도 슥슥 벗긴다

온몸의 물이 다 빠져나가도록

늙은 오이가 운다

얘야, 너무 아프구나

잠이 들면 어디선가 삽 하나가

나를 푹 떠서 데려다 놓는다

나 떠나올 때 꿀떡 삼킨 그것

허물어지고서도 여전히 두근거리는 그것

태어난 적 없어

죽을 수도 없는

집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