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이
-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곤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
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변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
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
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
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어선 적
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
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
펜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매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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