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물을 계속 틀어 놓으세요 / 박소란

주선화 2023. 6. 7. 10:51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박소란

 

 

상수도 공사 후 수돗물에 이물질이 섞여 나온다

민원을 넣는다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도무지,

 

흙이 나오고 쇳조각이 나온다

누가 저질렀는지 모를 알들이 쏟아져 나온다

알은 부서지기도 한다

알에서 뭔가 태어나기도 한다 살 수가 없어요 살 수가, 울먹이면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요령을 알 수 없다

 

사랑도 나오고 결국 사랑은 아니었던 거지, 도 나오고

 

그 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군다

밥을 말아 먹는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키가 자라는데

 

점점 흐려진다 나는 차가워진다

물 흐르듯 흘러

어디든 당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지체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잠을 한 컵 떠 들면 미세한 꿈들이 순순히 가라앉고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아침을 깨우는 드릴처럼 말끔한 수도사업소의 안내문처럼

 

보란 듯 파헤쳐진 골목을 유유히 걸어갔다 걸어온다

번쩍이는 파이프가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으로

집은 여전하고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해결하지 않는다

 

철썩거리며 흘러가는 매 순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둥둥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