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나무의자 / 박은형

주선화 2024. 1. 19. 11:29

나무의자

 

-박은형

 

 

담장에 장미 넝쿨을 올려두고

나무의자 두 개

빨래집게가 물고 있는 공중을 보고 있다

 

곧 헐린다는 집들

목서 따위 나무의 이름과

낮달을 보여주는 비범한 골목까지

 

지키는 것인지

고여 있는 것인지

 

나날이 마르는 내 영혼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 무엇도 데려와 앉히지 못하는,

나무의자 두 개

 

담장이 좋지 않을까 아니야

장미 가시가 될 수 없다면 펄럭이는 공중으로 정할래

 

폐허로 낙인찍힌 빈집들 사이 서성이며

한 번쯤 있을지도 모를 후생을 골라 보는데

 

꾸무럭 까만 눈알을 뜨는 나무의자 두 개

폐허의 옆구리 냄새를 컹, 짖을 때는

다 늙어빠진 개의 앞발에 얹히는 저녁처럼 다정하다

 

홀로 비 맞다 썩을 즈음이면

삽목한 가지처럼 다시 땅 깊은 데까지 발을 뻗어가

저녁에만 몰래 자라는 나무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거야

 

한 그루 생이 비워진 나무의자를 따라 하다

무채색의 긴 그림자만 묻힌 채 나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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