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등장인물이 바뀌어도, 그리고 / 장은

주선화 2024. 4. 2. 16:32

등장인물이 바뀌어도, 그리고

 

-장은  <시작> 2024 봄호 신인상 당선.

 

 

다 안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그냥 당산나무는 당산나무고

오동나무는 그냥 오동나무인 거야

 

매끄럽던 창틀이 우툴두툴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직선도 약간의 곡선을 띠기 시작했다

 

창틀이 마모가 되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비비다가 다가가 만져 보았다

 

직선이 곡선으로 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 속의 주름이 깊어지기 전까지는

 

검은 손에 이끌려 간다

검은 모자 깊이 눌러쓴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열에 다섯은

검은 패딩 검은 바지 검정 구두인데

흔하디흔한 검은을 너무 몰아가는 거 아닌가

 

검은과 닮은 어둠, 하루의 절반에 가까운 밤

 

뭔가 맞지 않을 것만 같고

믿으란다고 믿을 수도 없는 거 같은데

 

불을 끄고 앉은 밤

어둠 속에서 뻑뻑했던 눈이 모처럼 시원하다

 

매번 같은 시간에 등장하는 개밥을 주는 여자

다시 쓴다 규칙적인, 그건 너무 안정적인 그림이지

북북 긋고 다시

 

빨간 티에 청바지를 입은 아이가 골목으로 통통통 뛰어나온다

또르르 굴러 나오는 사과처럼 상큼하게

 

아이를 부르며 따라 나오는 노파

쭈글쭈글 수분이 다 빠져 나간 사과

여기저기 멍이 든

 

아직 등장인물을 정하지도 못했는데

손이 점점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