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그냥 걸었다는 말 / 박소란

주선화 2025. 6. 19. 10:01

그냥 걸었다는 말

 

-박소란

 

 

담장 너머 버드러진 가지에 새까만 열매들이 매달려 있다

 

징그러워라, 누군가는 슬쩍 미간을 찡그리고

이야 엄청 열렸네, 누군가는 입을 헤벌리고 목을 길게 빼고

 

쥐똥나무라는 거야, 누군가는 다정히 일러준다

진짜?

누군가는 조그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서 있기도,

때 묻은 햇살이 빵빵거리며 들락거리는 곳에

알 수 없는 악취가 가시지 않는 곳에

 

나는 괜히 신기해서

쥐똥나무가 여기 있다는 게

이토록 자질구레한 것들이 가만히 살아간다는 게

어쩌면 인연일까? 묻게 된다

쥐똥, 쥐뚱, 쌈싸름한 글자들을 뜻 없이 우물거리면서

 

전화를 걸게 된다

오래 그리웠던 이에게

쥐똥나무라고 알아요 혹시? 알알이 쏟아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그러쥐면서

글쎄, 갸웃거리는 저편의 사람은

눈앞에 놓인 이면지에 무심코 끄적이겠지

쥐, 똥, 쥐, 똥,

 

어느새 구겨버리고 말겠지만

누군가는 카메라를 찾아 급히 셔터를 누르고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꺼내 들여다보기도 하겠지만

 

옛날의 쥐똥나무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걸

알게 되겠지 참 씁쓸한 일이야

알고 보면 딱히 씁쓸한 일도 아니라는 걸

 

한그루 나무일 뿐이라는 걸

 

갓 태어난 누군가는 엉엉 울고

그를 품에 안고 어쩔 줄 모르는 누군가는 나무 아래 잠시 쉰다

쉬었다 간다

 

골목이 지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다만 쥐똥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웠다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더러웠다고 지옥만큼 끔찍했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는

 

골목을 걷는다

바다를 보며 걷는 내내 그냥, 그냥, 뭉개진 열매를 밟는다

지울 수 없는 물이 들겠지만

 

밤에 혼자 걷는 누군가는

보지 못한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