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추천 100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주선화 2008. 4. 9. 10:46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56세) 시인, 그녀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매독같은 가을." (개 같은 가을이)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그는 시간의 뼈를 잘못 삼켰다."(시인)라며 시인의 기본 성깔을 운운한 그녀는 삶의 고통과 세계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

 

이 시에도 폐광과 같은 유폐와 자기 방기가 있다

시인은 '곰팡이'와 '오줌 자국'과 '죽은 시체'에 자기 존재의 흔적을 견준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귓가를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한 루머'일 뿐이라고 말한다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낫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시인.(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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