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경 시
소
어머니
나는 죽어서 소가 되고 싶습니다
푸우푸우 거친 숨을 내뿜으며
이 나라의 크나큰 어머니의 들녘을
젖가슴같이 부드럽게 갈아 일구어
푸르디푸른 보리밭을 가꾸는
튼튼한 농우소가 되고 싶습니다
은혜로운 이 땅의 일꾼이 되어서
푸른 싹을 위하여 쟁기날을 끌다가
저 한 몸으로 이 땅을 다 일구지 못하면
죽어서 북이라도 되어
잠 깨어라 잠 깨어라
삼천리 둥둥 가슴을 울리는
소가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
바둑론
우리가 스스름없이 우리라고 부를 때
바둑을 두자, 아우여 돌싸움을 하자
생나무 자라는 소리 쩡쩡한
남녘의 아랫도리 그 어디쯤에서
청동(靑銅)빛 말씀이 내리던
백두(白頭)의 천지(天池) 그곳까지
날줄과 씨줄의 모눈을 메우며
우리들의 날들이 오로지 나아가야 할
길닦음을 해 보자.
때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과
산수문제처럼 부대껴야 할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면서
내가 온 봄날의 잡꽃을 피우며
단발령, 추자령 숨가쁘게 치올라갈 때
너는 또 대둔산, 멸악(滅惡)을 넘어
잘 익은 가을의 단풍잎 물들이기로
그렇게 내려오라.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세상의 비어 있는 자리를 서로 메우며
한 상 가득 고봉밥을 마주할 수 있다면
꼬이고 꼬여서 만두속 같은 세상도
또 한 판 훌륭한 그림그리기 아니냐.
흑이다 백이다 온 들에 모눈을 메우며
삼천리 화려강산 모자이크를 그려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취(宿醉) 같은 것
시원히 아침의 해장을 하지 않으면
언제 저 넉넉한 태평양 대서양
우리의 집 한 번 만들어 보겠느냐.
우리가 우리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때
스스로 셈하여 볼 내일도 있는 것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개구리를 보았나
내쳐라
비 오는 날 우산도 없는데
연닢에 싼 밥 한 덩이 없는데
어쩌지 혹시 무논에 돌멩이 던져 넣듯
우박이라도 내리면
움쳐 뛰지도 못하고
얘야 감기 들겠다 어쩌지
개구리 밥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기침하듯 가을이면 좋겠는데
올챙이는 다 개구리가 된다면
진땀 흘리듯 단풍이 들어도 좋은데
아주 생이빨 앓듯 노을이 져도 괜찮은데
잘도 피하다 뒷굼치를 물린듯
폴짝 폴짝 아주 낙엽이 되면 어때
전율하듯 압핀에 꽃혀
알코올에 젖으면 또 어때
개구리가 개구리로서 개구리가 된다면
나는
냄비안에서 고요히 끓고 있었습니다.
온도에 몸 맡기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개뿔은 없다.
소만도 못하다고
개만도 못하다고
쥐나
저 달팽이만도 못하다고
개뿔도 없다고
원래 없는 것들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보이지않는 마음에도 못을 박네
나는 왜 뿔이 없는가.멍멍 짖지도 못하는 뿔이 없었으므로 소같이 들이받는 말들에 늘 상처를 입으며 오뉴월 게장같이 소금에 절어 나는 왜 뿔이 없는가.집게같은 가위손같은 엄발같은 뿔이 나는 왜 없는가.못된 송아지 같이.
뿔은 늘 보이지않는 곳에서 나를 쥐어박고
뿔은 늘 길을 앞질러 와서 나를 가로막고
뿔은 늘 내 반대 편에 서서 나를 비웃으며
이제 원래 없는 것들조차 없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는 아주 금지된 것들도 엄발같이 슬금슬금 다가와
정수리에서
등 뒤에서
엉덩짝에서
혀 끝에서 빛나는
뿔.
서른 살의 박봉씨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봉급날이 가까운 하오
-오랫만이군 친구-
가볍게 어깨를 짚으며 걸려오는
전화는 두렵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_
짤랑짤랑 토큰 소리를 내며
-아하! 만나야지 그럼-
가볍게 약속은 하여도
짧은 소매의 가을빛에 내보이는
-그럼, 거기서 만나세 허허!-
빈약한 웃음은 괴롭다
찻값을 내어야할 적당한 시간이 오면
종종 구두끈이 풀리고
술집을 나설 때쯤이면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이런 날의 만남은 두렵다
-저런, 계산은 내가 할텐데-
벌써 친구는 저만큼 앞서 가고
-다음에는 내가 냄세-
정말,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찬 밥
아이를 가지고 입맛이 없다는
아내를 위하여 찬밥 한 그릇을 말아
멸치 몇 마리와 함께 들여온 나는
온갖 너스레를 다 뜬다
내 유년의 고향 얘기며
풋고추며 양파며 된장이며
마늘종다리 장아찌까지 들먹이며
이 여름 쉬말은 찬밥 한 덩이가 얼마나 맛나는 별미인지를
그러나 아내여
눈웃음 치며 게눈 감추듯
찬밥 한 그릇을 먹어치우며 생각해보면
찬밥이 어찌 밥이 차다는 뜻 뿐이랴
내가 세상에 나와 오로지 굽실거리며
아양떨며 내 받아온 눈치며 수모
그 모두 찬밥인 것을
아내는 아직도 입맛을 다시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제가 배웠던 고등학교 교과서 그 낭만적인
김소운과 가난한 날의 행복 한 구절을 떠올리며
정말, 우리는 늙어서 할 얘기꺼리가 많겠다고
스스로 결론까지 짓는 아내 앞에서 더욱
너스레를 떨며 아양을 떠는 나는 누구냐.
가랑비 촉촉히 속으로 젖어드는
찬밥 한 그릇.
몽유도원을 사다
백화점에 들렀다 복숭아통조림 한 박스를 샀다.
이 복숭아 철에 웬 통조림이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내 마음의 무릉도원 한 세트를 들고 신이 났다.
아홉 살이던가 열 살.
나는 홍역을 앓아 펄펄 열이 끓고
사흘 동안 미음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설탕물을 끓여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먹는 쪽쪽 나는 게워내고
할머니 이러다 우리 장손 큰일 나겠다고
쌀됫박을 퍼다 주고 사 오신 복숭아통조림
나는 꿈결인가 잠결인가 언뜻언뜻 도원(桃園)을 거닐며
따먹은 기억이 생생한 부귀복록의 천도(天桃) 복숭아
아내는 한참동안 제 철 과일이야기로 바가지를 긁고
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생각에 미리 즐겁고
나는 몽유도원 한 세트를 샀다.
장진주사(將進酒辭)
살구꽃 피면 한 잔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옆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 잔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하고 진다고 한 잔하고 삼백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하고 남도(南道)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 들면 한 잔하고 봄 다 갔다고 한 잔하고 여름 온다 한 잔하고 초복 다름 한다고 한 잔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하고 개천(開天)은 개벽(開闢)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잔하고 입동(立冬) 소설(小雪)에 첫눈 온다고 한 잔하고 아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詩)를 읽으며 한 잔하고 신명(神明) 대접한다고 한 잔하고 나이 한살 더 먹었다고 한 잔하고 또 한 잔하고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갓집에서나 만나야 쓰겠냐고
선배님께 꾸중 들으며 한 잔하고
아직도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니 웃음 난다고
반 너머 기울어진 절름발이 하현달.
여기 모란
웬만하면 한 번 돌아보지 그래, 웬만하면 한 걸음 멈추고 뒤돌아보지 그래,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저 폭포도 단오하게 휙 떨어져 내리기 전 한 번쯤 멈칫하듯이 웬만하면 한 번 되돌아보지 그래, 잠시 할 말을 잊었을 때 머리칼을 쓸어 올리듯이, 봄이 이미 왔더라도 이 추위 잊지 말라고 꽃샘의 바람이 불듯이.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저 악보가 오선지를 떠나 음악이 될 때 소리통을 한 번 쿵 울리고 떠나는 것처럼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이미 꽃이 진 자리에도 슬쩍 배추흰나비가 잠시 쉬었다 가듯이 웬만하면 웃어주지 그래, 잠시 구두끈을 고쳐 매듯이.
영영 고개를 돌린 이여
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대여
웬만하면
참 웬만하면.
모란으로 가는 길
모란에 들기 전에는 안개같이 모란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모란은 안개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움 순식간에 모여 든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법칙처럼 길을 만들 듯 단내 나는 여름 연닢의 소나기같이 갑자기 모란에 이르기도 하지만 모란에 들기 전에는 모란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욱고 굽어서 아주 신기루같이 결코 모란에 이르지 못하리라 멀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큰 산봉우리로 큰 바다로 피어있다 개벽(開闢)같이 눈 깜짝 할 사이 닿기도 한다 모란에서는 아무도 비밀(秘密)처럼 모란을 말하지 않지만 모란을 모르는 눈과 귀는 어디에도 없다 때로는 숨소리처럼 내 안에 들었다 때로는 기침처럼 나를 튕겨내는 저 모란에 이르는 길.
나 지금 어디까지 왔나 물으면
눈꺼풀 앞의 산 하나가 또 산 하나를 데리고 와
당당 멀었다 당당 멀었다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강이 넘치는 소리
내 안의 두문동(杜門洞).
'흥미 있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0) | 2009.01.30 |
---|---|
안도현시인 블로거에서.... (0) | 2008.12.28 |
시야, 놀자 ! (11회 문인수) (0) | 2008.12.14 |
김달진 생가 (0) | 2008.12.03 |
대추, 혀가 풀리다 (0) | 2008.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