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 가락지 / 김명인
그가 거두는 약속일까, 서쪽까지 걸어간 해가
어느새 테두리를 이울며 지고 있다
가운데를 뻥 뚫어 주홍빛 살결로 채운
가락지, 한 짝을 어느 하늘에서 잃어버렸을까
빛살을 펼쳐들고 수평선 아래로 잠겨든다
한 번도 디딘 적이 없는 저기 허구렁에
그가 뿌려놓은 또 다른 내일이 있다는 것일까
벙그러진 하늘의 목화밭
목화 따려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붉은 병을 던진 듯 활활활 송이송이 불타고 있다
나는, 솟아나고 가라앉으며 12억 광년 먼 회로를 따라
약속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억만년 전에 찢겨버린 흰 구름
푸른 물결로 떠밀리면서
이 모래밭에 착근하려던 한 알갱이 모래,
모든 소멸은 일몰로 간다, 다시 내장되거나
캄캄하게 태어나는 빛!
헤어지지 말아요!
해의 누이 달이 속삭이는 소리
약속을, 동쪽 끝에 걸어두었는데 어느새
혈육으로도 깁지 못하는 저녁이 왔다
이 절망은 테두리뿐인 가락지처럼 속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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