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주선화 2009. 12. 23. 13:17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이은규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그 언저리에 머무는 그늘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가다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의 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백작약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半生이 인사를 전할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긴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마중 나올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나는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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