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우두커니

주선화 2009. 12. 17. 11:02

우두커니 / 박형권

 

 

겨울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러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 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 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현대시학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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