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꽃 한 덩이 피어오를 때 / 주선화
두더지가 땅을 파면 아득한 방이 나올까
절룩절룩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
저녁 5시면 숨어버리는 계단
한낮인데도 빛이라곤 없는 방
하루 종일 형광등불빛에 몸을 움직이고
불빛이 사라진 곳은 쥐들의 세상이다
몇 달 전에 들것에 실려 나가버린 타이 한
베트남에서 온 마지막 이웃이다
돈을 벌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한 곳에 모여 같이 사는 게
꿈이라는 타이 한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당당히 꿈을 찾아 떠났다
저 먼 곳으로 갈 땐 속에 것을 모두 비워내고 가는 걸까
방안에 피어난 꽃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몸속에서 피어난 꽃이기에 벌떼 같이 모여들었다
맘껏 비워야 화려해질까
향기가 더 지독해질까
문턱 가까이 뻗은 손이 꽃처럼 피어났다
늑골아래에 부는 바람이 이곳에오면 잠잠해진다
숨소리까지 들릴 고요가 겁이 난다
하루하루 버터 온 길이 이제 사뭇 다르다
가을에서 겨울이 오고
전기장판에서 구멍이 숭숭
급기야 연기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떠나버린 이웃들의 웃음소리 환영처럼 들려온다
수국꽃 한 덩이 덩그러이 꽃대를 밀어 올리듯
둥근 문고리에서 젖은 희멀건 한 빛 흘러나온다
*영남문학 22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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