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 장옥관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 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搯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 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도 들어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 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아닌지 그것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돼지와 봄밤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굶어 가는 봄밤이다
시커면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둥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라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한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가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잡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를 추수하려면 낫이 있어야 한단다
시퍼런 날이 선 낫이 있어야 한단다 빛이 어룽댈 정도로
날 선 낫날로 쳐 넘겨야 한단다
그러면 옥수수는 콱, 자빠지겠지
무릎을 잃고 주저앉겠지
초록 피비린내가 왈칵, 뿜어져 나오겠지
하지만 조심하게나,
넘어지면서 옥수수는 칼날을 휘두른다네 날 선 낫보다
더 예리한 잎으로 눈알을 벤다네
먹물보다 더 캄캄한 대낮이 생긴 이유라네
찢어진 웃음 속에
흐흐흐, 치열 고른 이빨이 빛나는 이유라네
'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술 / 강지이 (2017년 중앙일보 신인 문학상) (0) | 2017.10.28 |
---|---|
2015년 노작 문학상 (0) | 2016.01.04 |
2014년 올해의 좋은시 (0) | 2014.04.21 |
2011년 소월시 문학상 (0) | 2011.12.16 |
시와창작 문학상 9회 (0) | 2011.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