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볼레로 / 조창환 감상 / 전영태

주선화 2022. 3. 3. 10:57

볼레로*

 

ㅡ조창환

 

 

희미한 공기 덩어리가 걸어온다

안개를 헤치고, 피리 소리들이 걸어온다

푸른 스카프를 걸친, 홰나무들이 걸어온다

열린 문(門)들에서, 구름의 신발들이 걸어온다

닭털 모자들이 걸어온다

젖은 전류(電流)들이 걸어온다

강철로 된, 비탈이 걸어온다

유황(硫黃)과 산(酸)이 걸어온다

황금(黃金)빛, 기관차가 달려온다

불과, 파도와, 수증기와

깃발들이 걸어온다

 

*라벨의 볼레르

 

 

 

감상

 

ㅡ전영태(문학평론가)

 

 

  시인들은 음악을 시 작품화하면서 음악의 구성과 멜로디와 리듬의 변화, 화성과 변조에 유의하여 최대한 음악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시와 음악의 관계에 집중하여 음악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걸어온다'는 아홉 번 각 행마다 반복되다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만 생략된 뒤 끝행에서 열 번째 반복되며 끝맺고 있다. 이것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오스티나토(반복되는 똑같은 음형)의 두 개의 선율과 하나의 리듬을 연상시킨다. 처음에는 일정한 선율과 리듬이 소음량으로 나오다가 집착적으로 많은 악기가 참여하면서 엄청난 음량으로 증폭되고, 한 차례의 반전을 거쳐 거친 파열음으로 끝맺는 볼레르의 도취적인 음악 구조, '걸어온다'의 반복과 무수히 등장하는 갖가지 이미지들은 그 음악 구조에 대한 언어적 수축 · 대응 구조로 대비되고 있다.

 

"불과, 파도와, 수증기와/ 깃발들이 걸어온다"라는 끝에 이르러 격정적 감정이 분출하는 국면을 묘사하는 한편, 그 격정이 음악이 멈춘 다음에도 진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걸어온다'라고 했지, 걸어와서 그 자리에 섰다거나 무엇과 부딪쳤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음악과 시는 끝났지만, 앞서 나타난 모든 사물과 대상은 아직도 걸어오고 있다. 시인은 음악이 그의 심성에 던진 파문을 즉물적으로 파악하여 그에 대한 시적 반응을 뭉뚱그려 표현할 언어적 등가물을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