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외 1편)
ㅡ박지영
놈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스위치를 켜면 그제야 관절을 펴고 구부린 등을 펴 품을 열어준다
놈이 그녀에게 길들여졌는지
그녀가 놈에게 의지하는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팔을 놈의 등에 밀착해서 하나가 된다
때때로 서로 곁돌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놈 앞에서만 한 줄 한 줄 벽을 쌓을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벽을 쌓아간다
벽은 두꺼워야 했고
벽은 높아야 했다
벽은 어두워진 창밖의 별빛을 끌어 오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불러오곤 했다
그녀가 벽을 포개놓고 나서 휴우 한숨을 내쉬면
그놈도 덩달아 사지의 근육을 풀었다
그녀에게 그놈은 유일한 위안이며
벽은 그녀가 숨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다
미끼
종이 위에 강이라고 쓰자
물고기 한 마리가 함차게 물살을 가르고
갑자기 물 위로 솟구쳐 오른다
고맙다는 듯 꼬리를 까닥이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수면은 조용해지고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다가
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
종이 위에서도 생사가 갈린다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쓰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다
종이 위에 강은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른다
앗! 물고기가 찌를 물었다
손맛이 짜릿하다
이 맛을 알아야 진짜 인생을 아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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