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戀)(외 2편)
ㅡ고미경
타오르는 마음 뒤편에서
그늘을 짜 왔어요
당신도 다 들여다볼 수 없는
우물 같은 그늘을
오늘, 목백일홍 나무 곁에서 열꽃인 양 피어난
꽃들 바라보다가 눈치채고 말았어요
뒤편에 꼭꼭 숨겨놓은 그늘을
울컥 젖어서 들여다보았어요
제 안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꽃들은 저렇게 온몸으로 그늘을 짰을까요
서늘한 모시올로 짜 올린
우물빛 그늘!
당신 바라보다가
수굿이 펼쳐놓은 그늘 몇 필
서쪽 해변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네 횟집 수족관에 약에 취한 천사들이 누워있네 날개는 오래 전에 지느러미가 되었네 천사는 루비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물고기가 되었다지 검은 동공이 터엉 비어있네 가만히 들여다보면 출렁이는 비린내 어쩌지 못하는 날의 슬픔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네 눈꺼풀을 덮어주면 슬픔아, 잠들 수 있겠니 태양이 붉게 익어버린 저녁이면 까마귀는 까악까악 울면서 천사의 루비를 찾으러 날아가네
당신이나 나나 어쩌지 못하는 이런 해변 하나쯤은 갖고 있네
혼자서 허니브레드를 먹고 있을 때
눈발이 시작되었으니 자,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해볼까
당신은 표정들이 복잡한 거리에서 되똑하니 서 있고 나는 2층 카페에 앉아서 당신을 바라보네 길을 건너려는 것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어쩌면 당신은 버려진 마네킹인지도, 떠돌이 개인지도 모르네 워리, 워어리, 워~~어리, 나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득한 당신을 구음으로 불러보지만
당신은 길의 표정만 가늠하고 있네 아니 허공으로 멀거니 우묵한 눈빛을 던지고 있네
히말라야의 라다크 어느 마을, 우리가 옛적에 떠나온 그 집 벽엔 수호신처럼 푸른양의 머리가 걸려 있었지
지금쯤 고산의 겨울엔 푸른양들이 짝짓기를 하겠지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펄럭이는 오방색 타르초에게 속삭였던 밀어들은 눈발이 되어 이 도시까지 찾아왔지만
나는 2층 창가에서 당신은 갈 곳을 잃어버린 거리에서 영혼의 떠돌이가 되었네
눈발이 더 붐비니 자, 이젠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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