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가는 길
-백윤석
구슬 꼭 쥔 조막손*에 달구지는 멈춰 섰다
바람이 재촉하다 잠시 쉬는 이별 앞에 때 아닌
천둥번개도 하늘 찢고 울었다 절망이 너울 치는
흑산도 가는 뱃길 집채 파도 뱃전 넘어 황포돛대
위협해도 절망은 또 다른 희망, 하늘에 몸 맡기고
바다는 국문하듯 나를 자꾸 채근했다 죽음 잠시
두려워져 설핏 그분 등졌으나 남은 생 이 꽉
깨물고 속죄하고 싶었을 뿐
길은 또 다시 암전, 창살 없이 날 가두고
시랑고랑 앓는 속내 가다루어 일으켜도 갈마든
밀물, 썰물을 감시하듯 번을 섰다 죽지 꺾인
가마우지 하늘 접고 바다 날 때 비척이는 그림자로
고갯마루 넘어 보다 아차차! 하 널린 시간, 초를
재고 있었다니 귀천貴賤은 팽개치고 허울도
벗어던지고 사람이 파도로 와 외로 선 나를 삼키면
한구석 가만히 앉아 채찍 온몸 받아내다
육신은 옭아매고 마음은 풀어놓고 어우렁더우렁
어깨춤도 부어가며 내 안에 단단한 벼루, 숨겨
먹을 갈았다 책상물림 갓끈 풀어 한구석에
내던지고 오징어 먹물 찍어 붓끝 세워 적는 어보
보름달, 등잔불로 떠 빈방 안을 채운다
그림자도 따로 논다 허벙 찧는 공맹의 도, 어진
임금 광배 속의 갓밝이 손에 쥐고 그 어둠 깨내고
싶었다 뿌리 뽑고 싶었다 때로는 길 없는 길
첫발자국 길을 내듯 배교의 오명 빌어 겨우 얻은
묵숨줄에 무언가 옥죄고 싶었다 나를 묶고 싶었다
나는 섬, 무욕의 섬, 겁 많은 섬이었다 사위는
아찔 단애 파도는 늘 말 걸어도 앙가슴 들끓는
응답 미처 표현 못하고 난 이윽고 새가 되어, 죽지
부러진 새가 되어 날고 싶어 푸른 하늘 무시로
응시했으나 그마저 내 일이 아닌, 바라만 보는
운명 바다는 그 와중에도 나를 늘 그러안고 섬일
때도 새일 때도 꾸준히 날 보듬어 드넓은 자기
세상을 고루 펴 나눠주었다
노을 문 바래길엔 동이마다 만선이다 초고에
실린 소문 해저 만 리 닿았을까 들레어 퍼덕이는
소리 흰 여백을 지운다 졸필로나마 적은 요량 하늘
끝 닿은 그날 초고를 모로 베고 구름 위에 눕다
보면 알겠네, 날 가둔 것은 나였던 걸,
* 정약전의 장남 정학초가 뱀이 많은 흑산도로
유배가는 아버지를 위해 뱀을 쫓는데 좋다는
구슬을 전해주었다는 설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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