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주전자 / 신미균

주선화 2022. 10. 5. 11:22

주전자

 

-신미균

 

 

보리차를 끓이다 깜빡 잊었다

물이 다 졸아붙고 주전자 안의 보리가

새까맣게 타고 주전자 꼭지가 녹아내리고

손잡이의 플라스틱에 불이 붙으려 하는데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손잡이에 붙은 불이

온 집안에 옮겨 붙을 뻔했다

왜 이 주전자는 뜨거워도 자기가 다 타버려도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걸까

 

암이 온몸으로 번져

죽을 지경에 이른 아버지를 만난다

까맣게 타버린 얼굴로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어릴 때 뛰어놀다 들어와 입을 대고 마시면

언제나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던 아버지

의사 말대로 조기에 발견했더라면

이렇게 심하게 타버리지는

않으셨을 텐데

한쪽 구석에서 소리 없이 계신

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늦었지만

나는

초강력 철 수세미로

있는 힘을 다해

주전자를

닦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멸의 꽃 / 김왕로  (0) 2022.10.13
꽃사태 / 이경교  (0) 2022.10.10
ㅁ평전 / 하두자  (0) 2022.09.28
애월涯月을 그리다 3 / 김밝은  (0) 2022.09.21
뿔의 자리 / 홍계숙  (0) 202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