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이대흠
책을 만드는 중입니다
일종의 자서전이지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잘려야 하듯이
내 생이 싹둑 베어집니다
살아갈 날들을 미리 쓸 수는 없습니다
반죽을 펴듯이 바닥에 나를 납작하게 눕히고
잉크 대신 피의 글씨를 써나갑니다
바람이 읽고 가고
먼 데서 구름은 곁눈질로 스쳐갑니다
나를 가장 깊이 있게 읽는 자는
살해자입니다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에
나의 표정을 발라줍니다
피 맛 좀 보세요
이게 살아 있음이었거든요
죽음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말을 가진다는 것
활자에서 싹이 나면 읽을 수 없을 겁니다
딱딱한 바퀴들에게 온기를 가르치고 싶지만
완성된 책은 말을 만들 수 없습니다
둥근 바퀴들은 납작한 나를 읽고 갑니다
바퀴들의 상처가 닿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조금씩 떼어줍니다
내 자서전은 그렇게 팔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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