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난한 말들(외 1편)
-이은송
왜 아픈 것들만 내 몸 같은지 모르겠어요
이건 분명 내 연민의 오래된 유전자 때문이에요
이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만 집으로 데려왔어요
낡은 주머니에서는 늘
구부러진 연장이며 구부러진 말들이 잠들어 있었어요
집 안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구석구석 쌓이고
삼각형의 기호들은 누룩처럼 삭아갔어요
돌아온 아버지가 헌 주머니에서
이끼와 녹이 슬어 부서지는 기호 같은 말들을 꺼내 놓을 때
그건 오로지, 나만이 알아듣게 될 말들이라는 것을
무심하게도 그때는 몰랐어요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찬 그 말들이
낙엽처럼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일 때
나는 가랑잎처럼 야위어 갔어요
가난한 것들과
서러운 것들과 휘청거리는 것들만 눈에 밟히고
내 어깨에 닿아 어지러운 것은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지만
잠시 잠깐 사이 노랑 민들레 한 포기가
내 심장에 질긴 뿌리로 내릴 줄은 몰랐어요
그 뿌리 때문에 앓는 동안
잠깐 사이 연민 같은 당신이 내 어깨에서
줄기로 돋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명 속 나무 한 그루
연두 잎사귀 드문드문 돋는 계절이 오면
오랫동안 모래바람에 아파온 내 귀는 더욱 아려와요
아프게 아려오면, 나는 어두운 귓속 골목을 맨발로 걸어
당산나무한테로 더듬거리며 가요
비틀거리며 나무 가까이 쭈뼛쭈뼛 다가가면
종이꽃 이파리들을 나무에 걸어놓고 꽃상여를 타고 떠난 주름 깊은
당골네 할매가 나무 속에서 손을 내밀어 줘요
'애야, 네가 아프구나'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요 둥근 서랍에서 심장 모양의 오르골을
꺼내 빛나는 종소리로 나뭇잎의 노래를 불러주어요
새의 울음 같은 종소리가 내 달팽이관을 구슬처럼 몇
번을 더듬어 오르고 내려오면
아린 내 귀는 그때부터 조금씩 우는 것인데
흘리는 족족 초록 진액이에요
내 귀의 울음은 기실 오래전 나도 모르게 들어와 둥지를 틀고
함부로 살던 바람 소리며 새소리며
알수없는 누군가의 구슬픈 휘파람 소리예요
나는 누구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병病에 걸려
'연두를주세요' '연두를 주세요'
하고 바람에게 속삭이곤 했던 것인데
바람은 자꾸만 내 귀에 휘파람만 불었던 것이에요
연두색 솜털 같은 잎사귀들이 가지마다 폭설처럼 내릴 때면
난 이명 속 초록 당산나무 할매를 찾아가요
할매는 내 귀에 박힌 아픈 가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며
침을 발라 꼭꼭 눌러주어요
그제야 나의 귀는 연두로 조금씩 정갈해지고
아렸던 마음은 조금씩 눈을 뜨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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