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오려내는 힘 / 김복희

주선화 2025. 8. 7. 10:32

오려내는 힘 / 김복희

 

 

밟고 있는 땅이

필요했어

붓꽃에 뿌리가 있다는 증거가

삶에서 떠내려가지 않는 이유가

 

붓꽃

물가를 따라

물로 흘러내리는 흙을 붙잡는

 

우거진 풀 사이 벌레처럼 날아드는

기억에 남지 않는 손

그게 물가를 걷는 네 등을 살짝 밀어주지

 

너 모르게

네 용기를

돕는 푹신하고

그늘 없는 땅

 

창포원에서

아무것도 밟아 죽이지 않는

붓꽃을 봤어

그건 너도 나도 아니었고

 

그늘을 흔들고

이마를 들추는

바람, 창포를 하나하나 다 건드리고 가는

바람

 

너와 나를 습지원 풍경으로부터

오려내지

너와 나를 기슭에

머물게 하지

땅 위에 서게 하지

 

 

 

유년 / 김복희

 

 

너를 잊는다

 

네가 덮은 햇빛의 부드럽고 노란 털,

그 위에 쏟아지는 졸음,

어둑한 오후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온갖 물의 서로 다른 소리들

 

폭우는

대문까지 오는 길과 마당과 마루를 지나

네 방에 들어오려고

네 잠에 징검다리를 놓는다

 

남에게 거져 주거나 헐값에 팔아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다시 내리는 비

새롭게 낯선 비

 

네가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너를 기다리는

어린 비

 

네가 길에 떨어뜨린 것들을

딛고 오는 물

 

너는 발뒤꿈치를 들고

방에서 폭우를 몰아낼 방법을 찾다가

네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선택한다

 

너는 폭우가 놓은 징검다리를 딛고

마루와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선 다음

햇빛 속으로 들어선다

 

너는 내내

빛에도 그림자에도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