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 / 기형도 病/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 짧은 시 2008.05.27
생리 /김선우 생리(生理)/김선우 달걀을 깨는데 달걀 속에서 피 묻은 노른자와 흰자위가 쏟아졌다 노른자와 흰자위의 경계에 붉은 혈관들이 가느다란 실금을 이루며 멍울져 있었다 심장을 이루려 뒤채던 것이거나 고독한 붉은 벼슬이나 날개를 향해 가던 것들 장마 끝의 돌연한 폭염처럼 냉장고 속에.. 짧은 시 2008.05.26
詩가 흐르는 휴대전화 아픈 자리 생살 돋듯 / 온 산에 신록이 / 치밀어 올라오는 이 아침 / 당신도 아아 살고 싶으시죠?' 황지우 '겨울의 고독속에 내던져진 대지가 온몸을 아파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카진차카스<뱀과 백합>) '새해 마당에 또 내리는 눈: / 차마 밟지 못하고 / 저 순한 마.. 짧은 시 2008.04.28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것 /박지영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것 / 박지영 팔조령 옛길 오르다보니 고갯길은 적요하다 새 길이 뚫리자 옛길은 산간 마을 빈 집처럼 지루하게 낡아가고 있다 사람의 손때가 묻어야 집이 오래 보존되듯 사람이 다녀야 다져지고 윤이 나는가 보다 길도 운명이 있어 태어나고 스러지는 것이다 이 길은 명이 다했는.. 짧은 시 2008.04.16
아빠는 왜 돌을 가슴에 놓고 잤을까? 아빠는 왜 돌을 가슴에 놓고 잤을까 김종삼 시인이 딸의 소풍에 따라 갔다가 점심을 먹고 숲에 잠깐 누웠다고 한다. 한참 후에 딸이 다가가 보니 김종삼 시인은 가슴에 넓적한 돌덩어리를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딸이 그런 아빠에게 물었다. 왜 돌을 가슴에 안고 잤느냐고. 딸의 물음에 시인이 한 말이.. 짧은 시 2008.03.24
아궁이 아궁이 손끝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왠지 모르게 따뜻해지는 손 가만히 두 손 마주 잡고 있는 듯 손끝에서 조물조물 할머니 옛얘기가 흘러 나온다 손등을 어루만지며 "항상 여자는 손이 따뜻해야 혀, 그래야 남편한데 사랑받는거여" 아궁이를 보며 할머니 옛얘기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2008년 .. 짧은 시 2008.02.20
신생아 2 / 김기택 신생아 2 / 김기택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릿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 짧은 시 2008.02.12
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꽃 / 조정권 소리가 생각나지 않은 새 / 조정권 호수에 앉아 무속력의 수면에 취한다 잔잔히 펴져오는 소 얼굴에 취한다 저물 무렵에 올라오는 하얀꽃에 취한다 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하얀꽃에 취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물속 뿌리를 쥐고 잠들 물빛에 취한다 찾아야 할 마음도 있지도 않거니와 따라야 될 마음도 없.. 짧은 시 2008.02.03
가을이 앉았다 / 정숙희 가을이 앉았다 / 정숙희 문득 그리움 한 페이지 또 한 페이지 바라보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숨을 고른다 가을 몰래 논빼미에 앉았다 여름 햇살은 영글지 못한 벼 이삭 끝에 매달려 흔들리고 내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생각이 여름 해보다 길다 마산 카톨릭교구청 제 1회 신인상 작품 짧은 시 2008.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