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나기/나희덕 노인도 아기도 벌거벗었다 빗줄기만 걸쳐 입은 노인의 다리가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늘어진 성기, 주름진 사타구니 아래로 비는 힘없이 흘러내리고 오래 젖을 빨지 못한 아기의 눈이 흙비에 젖어 있다 옥수수가 익으려면 아직 멀었다 연길 들판, 소나기 속으로 늙은 자연이 어린 자.. 짧은 시 2008.08.21
그림자 /함민복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림자/함민복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짧은 시 2008.07.20
하늘의 그물 /정호승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하늘의 그물/정호승 2005-01-08 22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짧은 시 2008.07.18
초록 여관 초록여관 박형준 먼 옛날의 동물들은 초록여관에서 모자를 쓰고 다닌다 강물 소리가 나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때로는 불타는 피를 뒤섞은 강물 굳은 관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는다 저녁에는 관을 장식한 꽃 속에 벌이 죽어 있다 1004호나 1927호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주 멀리까지 달아나버린 강물 .. 짧은 시 2008.07.17
저곳 /박형준 저곳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空中)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짧은 시 2008.07.15
엎드린 개처럼 /문태준 엎드린 개처럼/문태준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이 묶인 줄을 잊고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눈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 짧은 시 2008.06.25
길의 길 /함민복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길의 길」전문 짧은 시 2008.06.24
삼학년 /박성우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천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짧은 시 2008.06.17
곰곰 /안현미 비굴 레시피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곰곰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 짧은 시 2008.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