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27]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너에게 한 공기 '밥'같은 존재가 되리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2006년>
- ▲ 일러스트=클로이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누군가의 보살행 없이는 어떤 하찮은 생명도 부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현존하는 '나'라니! 내가 나 아닌 누군가의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시 나는 '나의 전부'로 '무작정' 너의 떨고 있는 '가지 끝'과 '혈혈단신 묻혀 있는 뿌리 끝', 그러니까 너의 전부를 일깨우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사랑하는 일임을 말한다.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되어주는 거룩함!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이 되라는, 즉 생명이 되라는 메시지를 이 시는 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라는 한 줄짜리 한 연을 눈여겨보자.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는 '사랑한다'는, 너무나 흔해진 말의 무의미함을 이 시는 질타하고 있기도 하다.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까마득한 날에〉)하고 '저 무궁' 생명의 원천을 다시 한번 노래할 때 그의 마음 바닥은 나주평야의 그것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은 무궁한 모성적 사랑이고 모든 떠도는 것들의 안식을 감싸주는 사랑이다. 밥을 끓여 구체적인 사랑을 현현하고 마음의 항구로서 방랑을 재운다. 시인은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밀물〉)라며 서로의 상처를 만져주는 사랑법을 노래한다. 그 사랑은 더 깊어진다.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춘수(春瘦)〉)처럼 '길이 더 멀리 보이는', 사랑 너머까지가 보이는 혜안(慧眼)의 사랑이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 2008.10.2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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