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

화려한 반란 / 안오일

주선화 2010. 8. 21. 13:12

화려한 반란 /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그녀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하는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 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시간,
연하디연한 분홍빛 수밀도의 시간,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아랫도리에
반란이 시작되었다

 

 

지독한 힘

뒷산을 오르다 본다
봉분들 위로
올망졸망 피어나는 아기별꽃들,
진통이 시작됐다
구구구구 멧비둘기의 신호로
산파를 찾아 재빠르게 뛰어가는 청설모
자진모리로 감겨드는 허리의 통증으로
딱 죽을 만큼 뒤틀릴 때마다
그녀의 발은
늘 흙투성이 맨발이다
울퉁불퉁 불거진 발등에 걸려
때깔 좋은 햇살이 넘어진다
우지끈, 입술 깨무는 소나무 가지에
둥지를 트는 새들은 바쁘고
자잘한 돌멩이들이 땀처럼 비탈을 구른다
온 산이 들썩인다
낯선 신발과 함께

아무리 찾아봐도 내 신발이 없다
식당 안, 남아 있는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
가만히 발 집어넣어 보는데
남모를 생이 기록된 이 신발은 도통 낯설다
몇 걸음 걸어보지만
모양도 크기도 다른 시간
자꾸만 벗겨져 헛발을 짚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 발의
생김새와 버릇이 떠오른다
신발 속에는 그 사람의 굴곡이 있다
서로를 맞춰간 침목 같은 시간으로
동행이 되어준 신발,
발을 꼼지락거려보니
내 발만 놀고 있는 것인데
낯선 신발의 완고함은
내 걸음마저도 바꾸려고 한다
관계

1.

새 한 마리 갈대 위에
앉아 있다, 튕겨오를 수 있을 만큼의
휘어짐을 딛고
잠시 재잘거리다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새의 무게만큼
굽어지는 생
순간 흔들리다가
탄력으로 다시 팽팽히 서는
갈대, 저 푸른 힘


2.

활짝 핀 선홍색 꽃 위로
날아든 나비 한 마리
여린 꽃잎 가장자리
사알짝 발끝으로 밟는다
상처를 염려하며
조심조심 내딛는
발가락의 힘이 눈부시다

저, 저것 좀 봐
꿀을 빠는 나비의 입을 따라
파르르 떨며 확확 달아오르는
꽃,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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