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 있는 시

봄, 잔혹동화 / 김도언

주선화 2013. 4. 8. 15:36

봄, 잔혹동화 / 김도언

 

 

  해 기운 저녁 혼자서 깊은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는데요, 다행히

어떤 할머니를 만났어요.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손에는 어여쁜 토끼

한 마리가 들려 있었어요. 할머니는, 반가운 마음에 성급하게 길을

묻는 내 눈을 피하더군요. 할머니의 아름다운 잿빛 머리칼이 달빛을

부드럽게 품어내고 있었어요. 토끼는 소문을 먹고 자라는 동물 아닐

까 잠시 딴 생각을 하는데, 어머머, 할머니의 토끼가 할머니의 손가락

을 씹기 시작했어요. 나는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죠. 소리를 지르

지 않으면 토끼가 할머니의 손가락부터 시작해, 손목과 팔과 눈동자

와 몸통을 다 씹어 삼킬 것 같았거든요. 토끼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

을 때 할머니가 갑자기 산길을 뛰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 자리에

봄이 오고 있었죠.토끼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봄의 뒷목이 보였어요.

 

 

의자

 

 

  어떤 의자는 사람이 앉는 데 쓰이기보다는 다만 의자라고 불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운이 좋은 경우라도 마음에 드는 의자를

만나는 건 자기 생애에 고작 두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의자는 사람이 비를 맞는 동안에는 비를 맞고 사람이 서럽게 울 때는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낡아서 비틀어져 도저히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된 의자는 노인들에 의해서 구원받는다. 신기

하게도 노인들은 튼튼한 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노

인들의 유일한 겸손인지도 모른다. 내가 길에서 만난 어떤 노인은 자

기 의자를 골목 앞에 내어놓고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인은 설령 자신이 말을 못하고 눈이 멀어도 자기 의자가

어떤 의자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표

정을 지었다. 노인은 낡아가는 의자를 위해 음식량을 조금씩 줄여왔

다. 그쯤 되면 의자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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