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칠판
ㅡ김 영
비 내린 오후
움푹한 곳마다 물이 고였다
저녁이 되자 근처 네온 간판들을
필사하는 고인 물들
베껴 쓸수록 맑아지는
물의 학습법은 단호하다
밤이라는 칠판을 구해다
반사하는 필법을 구사하다가
조금이라도 건들라치면
저 스스로 구겨지는 글자들
아니지, 구겨진 칠판을 닦고
다시 반듯해지는 고인 물
고작 빛나던 달이나
별을 받아 적던
고인 물들이 언제 저렇게
다국적 언어를 습득하게 된 것일까
붉게 때로는 파랗게 달아오른
불의 글자들을 불러들여 식히는 중일까
한밤을 뒤져서라도 살아가겠다는
밤의 경영법을 응원 중인지도 모르겠다
고인 물의 공부는
제 몸이 받아지도록 필사적이다
공부를 마친 물은 한 없이 가벼워져
지상의 온도 차로 신분을 바꾼다
우리는 그의 공부를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깜빡깜빡, 고인 물 하나를
애써 비켜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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