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밤의 칠판 / 김 영

주선화 2022. 5. 26. 13:57

밤의 칠판

 

ㅡ김 영

 

 

비 내린 오후

움푹한 곳마다 물이 고였다

저녁이 되자 근처 네온 간판들을

필사하는 고인 물들

베껴 쓸수록 맑아지는

물의 학습법은 단호하다

밤이라는 칠판을 구해다

반사하는 필법을 구사하다가

조금이라도 건들라치면

저 스스로 구겨지는 글자들

아니지, 구겨진 칠판을 닦고

다시 반듯해지는 고인 물

 

고작 빛나던 달이나

별을 받아 적던 

고인 물들이 언제 저렇게

다국적 언어를 습득하게 된 것일까

붉게 때로는 파랗게 달아오른

불의 글자들을 불러들여 식히는 중일까

 

한밤을 뒤져서라도 살아가겠다는

밤의 경영법을 응원 중인지도 모르겠다

 

고인 물의 공부는

제 몸이 받아지도록 필사적이다

공부를 마친 물은 한 없이 가벼워져

지상의 온도 차로 신분을 바꾼다

우리는 그의 공부를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깜빡깜빡, 고인 물 하나를

애써 비켜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