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시대의 자화상 / 장진숙

주선화 2024. 8. 22. 07:59

시대의 자화상

 

-장진숙

 

 

인내심이라곤 씨알도 없지

열일곱도 스물일곱도 아닌

서른일곱씩이나 먹은 에미가 어떻게 그래

지 남편 사고로 병실에 누웠다는데

네 살배기 어린 것을 방안에 홀로 재워둔 채

문 걸어 잠그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니

엄마 찾은 아이 울음소리 귓가에 들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어떻게, 밥 먹고 잠도 자고 그리 지냈을까

석 달이 지나도록 아기 혼자 그렇게 가둬두고

한 번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가족이 가정이 모정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두겹 쓴 버러진가 짐승인가 괴물인가

내연의 사내랑 월세방에 잠들어 있다 붙들려왔다는

고년, 참! 부끄럼도 모르는 것이 낯바닥 보일세라

숨어서 저! 저! 말하는 본새 하고는

누군가 찾아와 지 새끼 데려갈 줄 알았다니!

죄책감 책임감이라곤 씨알도 없는 여자

개념도 양심도 헐값에 넘긴 바람난 미친 것들

많긴 많은가 봐! 어린 것들 팽개쳐 두고 뛰쳐나가

오래 소식 없는 것들 부지기수라 동네마다

늙고 병들고 기운 없는 가난한 노인들

버럼받은 가엾은 손자 손녀 기르고 가르치느라

차마 죽지도 못해 굽은 등 더욱 굽는다는데

이제 제발 가난 탓 돈 탓이라고

씨도 안 먹힐 변명 따윈 하지도 마라

3D 업종마다 일할 사람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고

산속 절간엔 공양주 자리 비어 걱정이라더라

가엾은 네 살배기 빈집에 홀로 남아

허기와 공포와 외로움에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좁디좁은 한 칸 방을 헤매다 헤매다가

더러운 벽지라도 그렇게 쥐어뜯어 먹었을 거야

말라버린 우물처럼 눈물도 울음도 그렇게 시들어갔을 거야

어찌해야 그 가엾은 넋을 위로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시궁창에 처박힌 더러운 죄 씻을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몹쓸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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