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 질 녘 남쪽 해변에 닿았다
길은 헤맸지만 도착했다
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
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
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
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
여기 많다
고동이 맞는 말이야?
밀려나가면 밀물이야? 썰물이야?
바지 걷어 올리며 큰소리로
내게 묻는 건지
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
헷갈리잖아
어두워 가는 갯벌 위엔 경이럽게도 금이 많다
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
흔적인지
자취인지
성과나 업적으로 파생되기도 하지
뻘 위에 못으로 그린 추상화 같은
이것은
생존 발각될 단서
순식간에 체취될 노선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
퇴적물 위에
너는 해수 같은 혼합물과 갯벌 같은 잔여물을 사랑하고
오롯하지 않은 것들을 내가 사랑해서
우리는 편협한 안목을 지녔는지
포물선도
직선도
점선도
아닌
요절한 사람의 기다랗고 세밀한 손금처럼
고둥이 온몸을 밀며 길 반대편의 길을 만들고 있다
고둥이 지나갈 수 있게 맨발 들어 준다
온몸으로 쓰라는 죽은 시인의 말을 끝끝내 모르겠다
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건 알지만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
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지겠지
길치인 우리가 좋다
빈 비닐봉지가 후덥지근한 밤바람 싣고
온몸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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