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사슴뿔을 줍다(외 1편) / 이창하

주선화 2025. 3. 27. 08:43

사슴뿔을 줍다(외 1편)

 

-이창하

 

 

늙은 아버지의 지게가 생각나는 오후

지푸라기로 이어진 낡은 인연이 색이 바래지도록 땀을 흘리고 있다

오랫동안 이어진 나그넷길에서 너를 만난 것은

등이 굽고 백색인 아버지의 머리카락 같은 넝쿨 사이에서

멈춘 시간 속을 배회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나 흘려야 눈물이 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까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냇물 위에는 여전히 흰 구름이 흘러가고

나는 오래된 외짝의 설화 같은 너를 주워 든다

 

너는 아버지의 굽은 지게 형상으로 오래된 기억을 지키고 있었으니

모든 시작과 끝은 이렇듯 우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아는지

단순하게 맺어진 인연으로

아버지의 눈물 같은 형체가 그리워지는

세상의 근원을 더듬게 하는 오래된 기억을 주워 들게 한다

 

 

 

그리움의 뿌리

 

 

새가 그림자를 훌쩍 떨어뜨리고 산으로 날아갔다

꽃이 그림자 한 조각을 공중으로 보내고

땅속으로 씨앗을 던졌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가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순간이다

씨앗은 향기를 남기게 되었지만

새의 흔적은 공허하다

뿌리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

.

.

십수 년 전 고향 집은 그대로 두고

할머니가 계신 정토로 이사하신 아버지가 그립다

 

그리움에도 뿌리가 있다

 

 

 

*이창하 시집 <사슴뿔을 줍다>

-현대시 기획선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