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819

엘 살롱 드 멕시코 /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이태원을 무작정 베회하고 싶다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

각인 / 안희연

각인 -안희연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칼을 골라 든다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은 필시 칼맛이거든요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가게 내부를 둘러본다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빛을 안내 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저 먼 지평선을 향해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

초록의 어두운 부분 / 조용미

초록의 어두운 부분 -조용미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고도를 기다리는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숲은 팽창하고긴 장마로 초록의 색상표는 ..

몰염치 / 김휼

몰염치 -김휼  잠이 멀어지고 있습니다비로소 탁란의 계절이 온 것입니다숲의 둘레엔 불안한 울음으로 가득 찼습니다집에는 지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흘려들었죠어느 구름에 비 들지 몰라,어느 알 속에 뻐꾸기 새끼 있는지 몰라,둥지를 우긋하게 다녀가는 구름헐벗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집 없이 사는 법을 일찍 터득했습니다바람 앞에 구름은 왜 머물지를 못하는지공갈젖꼭지를 물려 두고 엄마는 왜 돌아오지 않는 건지알아도 알아도 모르는 것투성인데훔쳐먹는 사과는 왜 이리 달콤한지요물색 없는 사랑에 긴 잠의 본능이 눈을 뜨는 밤가차 없이 내몰린 진실을 감추기엔포식자의 배후는 너무도 얕습니다휘어진 등골을 뽑아 둥근 난막을 찢으면붉은머리오목눈이 갓 나온 싱싱한 울음충실한 본능이 몸집을 키우는 사이누룩뱀 한 마리 느릿느릿 풀숲을..

오늘은 바게트 / 데이지 김

오늘은 바게트 -데이지 김  처음 슬픔은 구름을 조금 떼어먹은 맛이다 건기의 여름 나무 아래이름 없는 연녹색 들풀 사이를 챙이 긴 모자를 쓴 그림자를 데리고 걷는다 구름을 빠져나온 일기예보 속으로각자의 슬픔을 만드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슬픔의 반죽이 숙성될 때까지 바짝 마른 바람이 부푼다계절이 바뀌어도 같은 계절엔 앞면도 뒷면도 딱딱해지는 얼굴이 된다 뜯어먹은 빵 속으로 쏟아지는 비 바게트가 더 바게트가 될 때까지발을 숨긴 소나기 속을 뛰기로 한다 평생 모아 온 슬픔의 방울들이 쏟아지며 금을 긋는 들판슬픔을 다 살아버리고 해를 다 먹어버리고 발효된 풀의 향기 굳었던 껍질이 의심없이 찢어진다 입안에 고인 슬픔이 무른 살처럼 부드러워진다

전력 질주 / 여태천

전력 질주 -여태천  우두커니몰려오는 저녁의 비를 바라보는새의 표정으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저 타자한때 그도몰려오는 저녁의 비만큼이나감정의 두께를 가졌겠지 게임은 언제나 정교한 자세를 요구해내리는 저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의주의력이 필요한 거야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베트를 휘두르고 싶어.정말이지 근사하게 오늘만큼은저 새와 함께 우아하게저공비행을 하는 거야그 어디쯤에 분명 네가 있을 테고무심한 너의 그림자에 놀라나는 잠깐 당황하겠지 차례로 자리를 일어서는 저 관중들 앞에서헛스윙으로삼진을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의무표정한 얼굴을, 다시 한 번보여주고 싶어오늘따라 너의 꽉 다문 입술이 슬퍼 보이는 걸까 이미 끝난 게임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터지는 장외 홈런우리의 생은 펜스 너머로 아득히 멀어지고낮게 몸..

회귀적 기울기 / 김휼

회귀적 기울기 -김휼  그립다는 말을 뭉뚱거리면 서쪽이 됩니다어쩌자고 부끄럼만 주는 노을을 동경하였을까요사랑과 구원은 정말 별개일까요한때는 누군가의 꿈이었을고하도* 빈집 낡은 의자에 앉아부풀다 꺼지는 것들의 미화된 세계를 생각합니다줄이 끊겨 울리지 않은 전화벨 소리아침저녁 바다를 들여놓던 창틀은 기울어져 있습니다공空을 향해 걸어갔을 무거운 발과 텅 빈 손흔들리는 그림자 뒤로고요는 꽃잎처럼 그렇게 내려앉았겠죠그 어떤 악착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 예각을회귀적 기울기라 말하고 싶습니다달리 방법을 찾지 못해 필사적으로 기운 외벽을 붙잡고 있는 달팽이뒤엉킨 채 뻗어 나간 줄기만큼이나지리멸렬한 미로를 우리는 세상이라 부릅니다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에 있는 섬

그러나를 수신하는 방식 / 이대흠

그러나를 수신하는 방식 -이대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결은 발생합니다숨결이거나 물결이거나 바람결이거나 한번 일어난 결은 번져서 끝까지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의 파장과 당신의 파장이 만나는 순간을파도가 쳤다라고 표현해야 할까요주파수가 맞으면 소리가 나오는 라디오처럼당신의 신호를 기다립니다 그러나라는 당신, 당신의 그러나 당신의 기척이 내게로 전해질 때 나는 몸 밖으로도핏줄이 흐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호흡에 나의 호흡이 묻혀갈 때 우리의 심장은서로를 흉내 내며 뛰었지요 보이지 않더라도전파처럼 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잠시 지지직거리며 나는 나에게 몰두합니다이미 온 감기처럼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당신을 찾아내었을 때 나는 어린 당나귀처럼 마구 나를 흘리고 싶어 견딜 수없습니다

기약도 없이 찾아오는 이를 위해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 최휘

기약도 없이 찾아오는 이를 위해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최휘  백련사 가는 오솔길 마삭줄 감긴 바위에 앉아 기다립니다저녁이 곧 올거니까 난 기다리는 즐거움에 빠져 있어이렇게 문자를 보내 놓고 꾹 참는 중이에요 저녁이 오면동백의 숲은 더 빨갛게 깊어질 테죠등불 같은 노란 꽃술들을 가지마다 매달 테죠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찾아오는 혜장선사를 위해 다산은밤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대요그도 이미 길모퉁이까지 와서 이쪽을 살피고 있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나타나진 마 놀라기 싫으니까기다리지 않은 척 이렇게 써 보냅니다 저녁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노을이란 신이 몰아쉰 숨이랍니다 번지는 노을에 그물을 던질까요왜 내 곁은 자주 비냐고 물으면 마삭줄 감긴 바위를 오늘의 이야기꾼이라고 할게요나라는 당신, 오솔길 저쪽으로만 ..

쉴 만한 물가 / 육호수

쉴 만한 물가 -육호수    당신과 개울을 건너다 나는 알아버렸지. 살아서건너야 할 개울이 이렇게 깊을 리 없다고. 그러나당신이 앞으로, 앞으로 가자고 했으므로, 나는앞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바닥에 발이 닿지않았다. 당신은 이곳으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당신이 험한 곳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으로갔다. 가고자 했으나 닿지 않았다. 당신은 점점 더깊은 곳으로만 향했으므로, 나는 혼자 돌아왔다.돌아가고자 했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나를잃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며 당신은,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배웅했다. 배웅하고자 했으나눈과 코와 입이 막혀 하지 못했다.   개울을 건너 당신은 돌아왔다. "나도 내가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당신이 말할 때, 나는알아버렸지. 산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수는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