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98

데자뷔 / 안지은

데자뷔 -안지은  찢어진 식탁보로 만든 애인,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내가 보인다애인에게 발이 너무 많아어디든지 갈 수 있으나 어디로든 가지 않았다 지옥엔 다 자란 네가 있어 애인의 예언에 열대야를 기르는 나날들귀를 막으면 별자리들이 바람에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나는 더 이상 운세를 믿지 않았다꿈만이 구원이라 믿었는데 꿈에서 애인이 죽었다누구의 꿈인지 누구의 애인인지 알 수 없어모두의 꿈이 섞이는 새벽에 자주 깼다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헷갈려서뜬 눈으로 앞을 보지 못하고벽을 더듬는 것을 키스라고 부르고 혀를 섞으면 검게 그을린 손가락들이 숲을 이뤘다죽은 애인은 매일 살아서 돌아왔다, 살을 찌워서나는 애인으로 불꽃놀이를 즐겨 하고 떨어진 살점을 주워 먹었다, 가끔눈을 감아도 애인이 보였다. 우리는핏속에 유리가..

청혼 / 안희연

청혼 -안희연  나는 손짓합니다오세요, 나의 집으로 저기 저 산 보이나요막혔던 벽에 창을 내고당신을 위한 식탁을 차리고창가에 작은 꽃병을 놓아두었으니우리 함께 산을 옮겨요 저렇게 큰 산을 어떻게 옮기냐구요네, 산을 옮길 수 없으니 산이지요하지만 내 안에서 당신이 솟아올랐으므로나는 높습니다 산은 천천히 깎이겠지요여름 장마엔 흙더미가 쓸려 내려오고겨울 혹한엔 죽어가는 산짐승들 구하지 못할거예요 그러면 우리더러워진 식탁보를 탓하겠지요창문이 산을 가두고 꽃병이 꽃을 가두었다고시름시름 시들기도 할 겁니다 시간의 쇳물이 얼굴 위로 쏟아지겠지요수수깡처럼 무릎이 꺾일 테고요우리 예뻤던 산언제 이렇게 보잘것없어졌지깊은 밤 이마 위로 서늘한 파도가 덮쳐올 때 대문을 열면 또 다른 아침작은 게 한 마리 도착해 있을지도요 품..

시간의 포구 / 박우담

시간의 포구 -박우담  누가 돌을 던졌을까블랙홀처럼 빛을 빨아당기는 구멍 점점 빨려드는 빛과 혹한의 동굴을 생각하며 나는 유성우를 기다린다 갯벌에 빠진 슬리퍼 하나, 네안데르탈인의 두려움과 추위까지 구멍에 쑤셔 넣는다 광적인 갈증이성녀와 창녀를 그려내는 빛과 어둠 인간의 굴욕이었을까뼈와 벽화와 그림자비바람은 불어오고 언 돌바닥에 내가 아닌 내가 웅크리고 있다 짐승 같은 동굴엔 검은 피가 묻어 있다 파도가 갈라지고 그사이 길이 왜 생기는지 성녀와 창녀를 바라본다관능이 별똥별로 내려앉는 포구 화석 인류의 시편들이 떨어지는 갯벌에검은 비 내린다 텅 빈 동굴 속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다   *박우담 시집 ㅡ도서출판 실천

가문비나무 속 여자 / 윤은주

가문비나무 속 여자 -윤은주  골목보다 긴 어둠을 돌아 우체통처럼 작은 집 앞, 차가 멈춘다지나던 바람 한 토막 불 꺼진 열쇠 구멍으로 여자보다 먼저 숨어든다아코디언 주름처럼 낯선 거실 안 풍경이 펼쳐진다피로를 가득 입고 온 옷자락이 바닥에 무겁게 쓸린다 언젠가 이 집에 왔었던가 오래된 서랍 어디쯤깊숙이 보관했던 빛바랜 종이처럼, 여자의 눈을 향해(오랜만이군 ....) 주술에서 풀려난 가재도구들이 돌아보며 말했다 소파에 누군가 커피처럼 엎지르고 닦지 않은, 오래된 적막백 년쯤 전부터 사용한 적 없어 보이는 얼음보다 차가운 벽난로그 위 꽃병 속 플라스틱 꽃들이 졸고 있다낡은 피아노 페달처럼 실어증에 걸린 마루가만히 발을 내딛자, 삐그덕한 가지 파찰음만 반복하는 나무 마루한 바퀴 빙 돌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분의 탄생 / 하린

기분의 탄생ㅡ눈사람 -하린  어떻든 사람입니다천사가 아닙니다 마당이거나 골목이거나 언덕이거나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목은 어디입니까고드름은 왜 생깁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면당신은 백색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주관성을 부여받았습니다눈 속의 눈이 생길 수 있고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감정이 없습니다만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적막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와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착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길고양이를 찾아 나설 참입니다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배고픈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으로 울 것입니다 그만 녹아 흐를 것입니다머리가 재빨리 심장에 달라붙어 기형이..

저 꽃은 저물 무렵 / 이소연

저 꽃은 저물 무렵 -이소연  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다모래사장에 짐을 내려놓고서야 생각났다 매리골드는 처음이잖아 이러니까 그리운 게 나쁜 감정 같네누굴 주려던 건 아니지만두고 온 꽃을 가지러 갈까?이미 늦은 일이야그냥 평생 그리워하자 꽃을 두고 왔어내가 말했을 때우리 중 평론가만이 그걸 가지러 갔다 나는 소리친다지하 2층에 있어!화장실 비밀번호는 꽃집 데스크에!해변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등뒤를 돌아본 것도 같고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말벌 한마리가 붕붕거린다 여기 있었네 왜 꽃을 두고 왔다고 했을까?너무 오래 기다린다어느 화장실을 뒤지고 있니없으면 그냥 와도 되는데 눈앞에서 평론가가 사라졌다 지갑만 꺼내려다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바닷가를 걷기 시작한다 모래사장은 끝이 보이지 않아 ..

콜리플라워 / 이소연

콜리플라워(외 1편) -이소연  콜리플라워가 암에 좋다기에 사 오긴 했는데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도 좋아" *댈리웨이 부인은 이 말을 다른 말과 헷갈리고나는 이 말을 누가 했는지 헷갈린다 조난당한 사람들이들판에 쌓인 눈을 퍼 먹는 장면을 봤다콜리플라워 맛이 난다 진동벨이 울린다암 걸린 애가 커피 가져와암에 걸리면 맘에 걸리는 말이 많다아픈 건 마음밖에 없네눈 뭉치 속에 숨겨 놓은 돌멩이를믿고 싶다흰빛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한 말들이 맘에 걸려 있다아파트 화단에 10층에서 떨어진 이불이 걸려 있다 엄마가 동영상을 보냈다나의 여인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트로트 음악이 깔리고꽃을 찍은 사진 위에 수놓은 건강 상식첫 페이지는 오이와 양파를 꼭 먹으라는 이런 건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 우남정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우남정  마디에 마디를 잇는다마디의 옆구리에서 길을 꺼낸다그 끝에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발가락이 달렸다 게발선인장 마디를 따서 흙에 꽂았다잘린 자리에 생장점이 있다니뿌리 내린다는 말이 어찌나 캄캄한지 모래밭에 부화한 새끼 거북이온힘을 다해 바다로 기어가다, 멈춘 듯했다 고작 내가 한 일이라곤등 터지도록 물 먹이는 일이었다소금 뿌린 듯 따가운 볕에 말리는 것이었다 서툰 주술도 주글거렸다뿌리 내린다는 말이 얼마나 막막한지한 조각이 죽은 듯 엎드린 시간 마디에서 마디가 나고 마디가 다시 마디를내밀어 마디를 이어가고 그 마디 끝에붉은 꽃 한 송이 매달 때까지,사막에 뿌리내리는 일 햇볕에 빛나는 것은 파편의 모서리 상처에서 한 마디를 꺼낼 때까지가마우지 때의 먹이가 되지 않고 바..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침착하게 사랑하기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

엘 살롱 드 멕시코 /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이태원을 무작정 베회하고 싶다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