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96

아늑하거나 아득하거나 / 성금숙

아늑하거나 아득하거나 (외 1편) -성금숙 상자 안에 들어가면상자 안은 아늑하고 삼나무 숲에 들어가면삼나무 숲은 아득하지 무리를 뭉치면우리는 넓어지고 뒷걸음치는 염소처럼 경계하며 쳐다보는 뿔들 당신을 내 안에 들이고내가 당신 안에 들어갈 때 당신은 내가 나는 당신이 안 보여서아득하여라, 아늑한 느낌도 조금 울창하지 오후 햇살이 당신 얼굴을 비스듬히 비추는 카페에서지난밤 집이 불탔다며 당신은 홀짝이네 아늑은 아득하여라아늑의 팔에 닿기 위해 먼 곳에서나는 아득을 견디네 상자 안은 아늑하고삼나무 숲은 아득하고 내가 들어가 머물고 싶은 곳은저녁의 입구처럼손잡이가 달인 문이 없어서 우리의 입은 벌어지고 -성금숙 새가 충분할 때는새가 많았으나 새를 막자 새의 함성은 오지 않고새의 밤도 오지 않고새의 펄럭이는..

기계 같은 사람이 / 김예강

기계 같은 사람이 -김예강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을까식탁에서 식구와 밥 먹고 있을까어떤 사람일까록밴드일까 도시계획가일까 건축가, 요리사, 시인일까혼자일까 나는 창가에서 팔을 창에 대고 턱을 괴어밤의 긴 팔에 안겨있는 길 건너 불 켜진 아파트 단지를 바라봅니다빨간 자동차 불이 흐르고 밤의 자장가를 들어요 나무를 준비하고 강을 준비하러잠이 드는 사람들 기계 같은 사람이 밤의 도시에는 별이 되는 생각이 들어요플러그에 꽂힌 거대한 기계가 가동되고도시는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밤의 아파트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돌밤의 커다란 천연동굴 같아요삶의 무늬가 동굴산호 동굴진주 같은 사람들 잘 자라 나무야 잘 자거라 물고기야 낡은 의자에 앉아졸다 말다 밤이 되려는 한 사람을 봅니다 물방울 같아 보이기도 해요

아키비스트 / 조온윤

아카비스트 -조온윤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문을 열었어누군가 문틈에 끼워둔 햇빛이발밑으로 툭 떨어졌지 쪽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네너무 오래 닫혀 있던 시간에 비해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겠다는 듯이 굴러갈 용기가 없어 멈춰 있는 공처럼웅크려 있던 밤에 대해서는 오로지나의 기록에 맡기겠다는 듯이 나는 그 시간을 동면이라고도 적어보고반성이라고도 적어보았지무엇에 대해라고 묻는다면너무 오래 가두었던 그림자에 대해 혼자서만 알고 있던 병명에 대해처음으로 비망을 하듯낯모를 미래에게 편지하면서 낯모를 미래의 손뼉이어깨에 포개지는 듯한 온기에 놀라조용한 실내를 돌아보면서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문을 열었어실례한다는 말도 없이열린 문 사이로 들어와몸을 뉘고 있는 빛이 있었지 그것을 주워 펼쳐볼 수 있다면단 한 번도..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김소연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오른손 바닥이 심장에 얹히고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목구멍을 통과하려는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눈물로 나를 세례(洗禮)하곤 했다자동우산을 펼쳐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하얀 타일 위에다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시 한 줄을 적어본다네모진 타일 속에는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 길을 항해 하다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누군가의 방주를 띄울 수 있도록 하는 자에게는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평생토록 새겨왔던 비문(碑文)에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자에게는

밤엔 명작을 쓰지 / 김이듬

밤엔 명작을 쓰지(외 1편) -김이듬 극장에서 돌아와 글을 써요 나는 지저분하며 조그마한 구역에살아요 항상 떠날 궁리를 하죠 안정감이 밤물결 소리를 내면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나를 여기 데려다 놓고 오지 않는사람이 혹시나 들를지도 몰라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켜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그렇습니다 맞은편 복도로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오죠 나는 밤새 책상을 부여잡고 표류한 셈이죠 그게 제 역할 같아요 나는어떤 게 명작인 줄 몰라요 맥베스 세트장에서 내게 말..

꽃의 속도 / 성영희

꽃의 속도 -성영희 불의 속도가 빠르다모닥불에서 옮겨간 검은 발화를 본다한 번 터지면 세상모르고 부푸는 꽃그보다 빠르고 붉은 꽃은 없어서 사람들은 가끔 놀이의 불꽃들을 쏘아 올리기도 한다허공에서 발화하는 불꽃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땅에서 옮겨간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땅의 화염이 된다첩첩산중도 빌딩 숲도거대한 잿더미로 만들고 마는 엄청난 식욕 속에는보이지 않는 하찮은 방심이 있을 뿐이다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번지는 불길에는파멸의 소리음이 외마디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거나잘 마른 장작처럼 토막 난 것도 아닌데그 어떤 걸음보다 빠르게 번지는 방심활활 타오르는 저것은 놓쳐버린 순간이다보이지 않는 검은 속내에는번지는 앞을 맹렬하게 쫓아가는 뒤가 있다반드시 앞을 막아서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

비탈에 기대다 / 박설희

비탈에 기대다(외 1편) -박설희 최루탄 난무하는 교정, 굶주린 배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스물한 살몸은 뜨거웠으나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지리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고말라가는 풀에, 갓 피어나는 꽃에, 시든 나무뿌리에핏방울을 뚝 뚝 흘리며 걸었다빈혈을 앓는 내 삶에수혈하듯이 연하천 벽소령 장터목·····몇 송이 꽃 피웠을까풀 한두 포기 튼실히 뿌리내렸을까 천지만물이 동기간물보다 진한 피를 나누었으니잘 견디고 살아남자는 약속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며, 잃기를 원하며어둠 속에서 네발로 기며길과 길 아닌 걸 구별하며 피를 나누었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을 때촉수를 뻗어보듯이피의 길을 늘여갔다 길은 계속 비탈이었고비탈이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나를 받아주었다이..

불행한 일 / 박소란

불행한 일 -박소란 불행을 응원한다 불행의 편에서더 더 더 불행해져라 입술을 잘끈 깨물면서,하마터면 진짜로 그럴 뻔한다 무너진 빌딩 뒤집힌 자동차 우연처럼 불탄 사람들우연처럼타다 만 사람들, 아침이면불행은 어쩔 줄 몰라하며 구형 TV 앞에 엉거주춤 서서폴리스라인이 함부로 뒤엉킨 뉴스를 보는데 그 침울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도무지 남 같지가 않고 간밤 나는 병들어 뒤척이는 한 사람 곁에 누워가늘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오래 들었다소리가 거의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그만, 이제 그만,기도하는 블행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집 안에는 언제나 냉기가 감돌고불행은 불행답게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웃고 싶지 않아읽다 만 책이 수북한 책상에 엎드려 대체로 혼자 지내지만때가 되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을 한다 일을 ..

작약과 공터 / 허연

작약과 공터 -허연 진저리가 날만큼벌어진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빗집 뒤편 숨은 공터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 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죽변항 / 안도현

죽변항 -안도현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아프지 않은데 병들었고슬프지 않은데 울었고삿대질도 없이 멱살을 잡았어요 뱃머리에 쌓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골목 끝에서라면에다 차가운 소주를 삼켜도 다 듣지요뱃머리끼리 부딪칠 때 갈매기 우는 소리 나는 거 당신은 눈 내리는 포구를 보고 싶다고 말했죠산통처럼 눈이 내려요편견처럼 눈이 내려요바다에 그물을 내리듯이그물 속으로 도루묵 떼가 몰려오듯이눈이 내리쳐요 보이나요 북방의 흰 빗금들이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눈송이는 지상의 빈자리를 꿰매고우리는 목덜미로 눈을 받으며노란 노끈으로 구멍 난 그물을 꿰매요점퍼 옷깃 안쪽으로 수북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며 하늘의 어깨에 근육이 붙었나 하고 생각해요갈매기들 깃털이 긴장하고 있어요바로 어제 포구에 새로 도착한 놈들이죠말라붙은 생선 비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