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지붕에 관한 시 3편

주선화 2008. 7. 21. 09:47

처마 밑에서

유종인

 

추억을 켜드릴까요

버림받음을 다시 받아올까요

 

저녁 불빛이 오면

저는 천년 전으로 꽃 피러

가겠습니다

 

빗속을 뚫고

제 뿌리가 가 닿는 곳, 당신은

여전히 滿開한 작약꽃들을 담은

제 마당이었습니다

 

부옇게 김 서린 안경 너머에

당신은

눈물의 球根 같은 눈알을

열심히 굴리고 계십니까

 

문 닫은 술집

지붕은 언제까지나 접을 수 없는 우산,

이 처마 밑에서

비의 창살이 걷히길 내

슬픔의 出所 날짜를 곰곰이 세고 있습니다.

 

 

 

<아껴먹는 슬픔>

 

 

 

 

 

 

 

지붕

박형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99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방주

윤의섭

 

   지붕엔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이 샌다 이불을 적셔도 식구

들은 잠을 깨지 않았다 지붕 고치러 올라간 아버지는 발 헛

디뎌 죽었다 지붕엔 뿌리내리지 못한 민들레 홀씨가 뒹굴었

다 지붕엔 바람이 솟구친다 미끄러졌다 지붕엔 벗겨진 신발

한 짝 쓰러져 있다 지붕엔 말라죽은 나뭇가지가 어쩌다 꼿꼿

이 서 있다 지나가던 비닐이 걸려 만장처럼 휘날린다 지붕에

앉은 낙엽이 썩고 흙이 쌓이면 민들레꽃이 핀다 지붕에서 도

둑고양이는 구멍을 통과한다 도둑고양이 다시는 안 나온다

지붕의 내장을 파먹고 산다 지붕은 축 처진 날개를 퍼덕이지

못한다 지붕 아래선 유언도 못 남긴 식구들이 입에서 입으로

뿌리를 박고 있다 식구들은 항상 지붕 밑으로 모인다 지붕은

기도하는 손깍지처럼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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