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가득한 허공이 저기 있다
내가 저 항아리를 빠져나온 건 백 년쯤 전이었다
나를 저 항아리에 집어넣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꽃이었다
결국 나는 아주 나중에도 꽃이 아니었다
뜨거운 피가 항아리를 가득 채우자
나는 꿀꺽꿀꺽 물고기를 낳기 시작했다
지느러미처럼 미끄러운 삶에 대해서
함부로 신뢰하지 말라
신뢰는 때로 미친 사랑처럼
무서운 속도로 한 생애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자,
한때 꽃병이었던, 항아리였던, 허공이 저기 있다
▲ 심수구 ‘고슴도치처럼’(판넬에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