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주선화 2008. 11. 8. 10:49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추한 세상을 뒤로 하고 나타샤, 함께 산골로 가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 일러스트=이상진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눈은 내리고 연인이 있는 곳에도 연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릴 때 한 대책 없는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다. 그윽한 영상을 펼쳐 보이며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시는 두 번의 절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도입부에 단도직입으로 펼쳐진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단다!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다, 요샛말로 '자뻑'이 한참 심하다. '낙엽이 져요, 당신이 그리워요' 이게 순서 아닌가. 그런데 이 시는 대뜸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여 낙엽이 지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꽃이 핀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이토록 과장되게, 그러나 천진하고도 사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뿐이리라. 두 번째 절정은 3연. 산골로 도망가자고 연인을 꾀는 시인의 속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이니 일본제국주의 압박이 점차 수위를 높여갈 때다. 세상은 갈수록 추해져 가고, 우리는 더러운 세상에 섞여 살기 힘든 순결한 존재들. 그러니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려버리자고 이 시는 선동하는 것이다. 기막힌 사랑의 선동이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다. 상대를 단박에 무장해제시키는 철없고 순수한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만하지! 게다가 이 말은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에 살자고 하는 시인에게 나타샤가 응답하며 고조곤히(조용히) 속삭이는 말로 설정해 놓았는데, 묘하게 아련하고, 아프고, 캄캄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는데 도리 있나. 푹푹 내리는 흰 눈 속에 응앙응앙 울며 어서어서 흰 당나귀가 와야지!

이제 당나귀를 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언젠가 눈은 그치고 말 텐데! 더러워 버린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은 살아내야 하는 걸! 몽환적인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이 시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시 잘 쓰고 핸섬한 모던 보이 백석(1912~1995)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 중에도 통영 처녀 '란(박경련)'과 기생 '자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백석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전하는 자야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리 되었다.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다. (김선우·시인)
입력 : 2008.11.07 06:59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2] 사랑 - 박 형 준  (0) 2008.11.11
농담  (0) 2008.11.08
머치,,, 처럼  (0) 2008.11.08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0) 2008.11.05
마른 물고기처럼  (0) 2008.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