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멸치

주선화 2008. 11. 24. 17:35

멸치/허연

 

 

 

          언젠가 하얀 눈보라처럼 바닷속을 휘저었을 멸치 떼가

        말라 간다. 영혼은 빠져나갔는데 하나같이 눈을 뜨고 있

        다. 죽기 싫었던 멸치가, 사랑의 정점에 있던 멸치가 눈도

        못 감은 채 말라 간다.

 

          말라서 누군가에게 국물이 되는 종말. 그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눈 뜬 놈들이 뒤엉켜 말라 가는 홀로코

        스트의 현장에서 한 됫박의 미라와 한 됫박의 국물과 눈

        물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저렇게 단순하게 눈물이 되는 걸.

          이제 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했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끔찍한 결과들로 뒤덮인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 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生)의 전부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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