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량역/ 문인수
모량역은 종일 네모반듯하다.
면 소재지 변두리 들녘 낯선 풍선을
가을볕 아래 만판 부어놓는다.
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개 때문에
저기서부터 시작되는 너른 논들을, 논들에 출렁대는 누런 벼농사를
더 멀리 부어놓는다. 개는
비명도 없이 사라지고,
논둑길을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 노인네는 또 누구신가.
누구든 상관없이
시커먼 기차소리가 무지막지 한참 걸려 지나간다. 요란한 기차소리보다
아가리가 훨씬 더 큰 적막을
다시 또 적막하게 부어놓는다. 전부,
똑같다. 하루에 한두 사람,
누가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말거나
모량역은 단단하다.
더도덜도 아니고 딱, 한 되다.
모량역의 거울
역무원도 없지만 아연, 다시 역이다.
중늙은이 아주머니 한 사람,
구부정하게 등짐을 멘 채 어디선가 지금 막, 당일치기로 돌아온 덕분이다.
자주 본 옆 얼굴이다.
바로 앞마을에 사는 주민이겠거니 짐작되지만
누군지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정면으로 날 마주본 적 없기 때문이다.
축 발전. 1987년도 역사 준공 이후 줄곧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내게 확인할,
뭘 자세히 물어보고 자시고 할,
그런 인생이 자신에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일까,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저 열 두어 걸음,
마디마디가 전부
아주머니의 일생일대 아니냐.
아주머니 힘내시오! 전면 마음 써 보는일,
오늘 일과도 이쯤에서 끝난 것 같다.
모량역의 새
떠나지 마라, 먼 타관은 춥다. 작고 따근따끈한 널 얼싸안고 여기 이대로
계속 짹짹거리고 싶다.
이 농촌 들녘, 간이역 대합실 중앙기둥 윗부분엔 직경 한 뼘 남짓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난로 연통 뽑아냈던 자리일 것이다. 장작이든 톱밥이든 연탄이든 때며
불기를 둘러싼 몇몇 사람의 손바닥들, 그 가난한 화력으로 밀고 간 시절은
슬픔 몇 섬일까,
연기는 다만 장삼이사 사라질 뿐, 그네들의 그늘 그을린 것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역무원도 두지 않는 빈 역사, 가을바람에도 되게 썰렁하다.
한때 불을 문 저 또렷한 기억, 새까만 입구가 못내 아깝다. 나는
저 입 다문 적 없는 모음 깊이 무슨 새 한 쌍을 슬쩍, 속닥하게 들여놓고
싶다. 더 이상 누구 떠나지 마라.
모량역의 시간표
대빗자루를 매단 헌 장대가 텅 빈 대합실 한쪽 구석 천장을 문 채 거꾸
로 서 있다. 천정부지, 쓸어버리고 쓸어버린 그 역사의 잔재가 여태 이
역사에 버려져 있는 것 아니냐. 아닌게아니라 빗자루의 머쓱한 허우대.
저것을 권불십년이라 한다. 오래전 이미 농촌인구가 대거 줄고, 시꺼멓
게 먼지 앉은 거미줄이 무성한 뒷말처럼 물리도록 칭칭, 빗자루의 거친
수염을 다 씹어놨다. 그러고도 수십 년이 흘렸으니, 간이역 시간표엔 어
즈버, 인적 없는 시간들만 빼곡할 뿐이다.
모량역의 운임표
기차에 묻어오는 묻어가는, 바람은 많다.
철로를 가린 측백나무 울타리와 울타리 너머 너른 들판 누런 벼농사에
바람이 많다. 손금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편도 오십리, 왕복 백리 간에
볏단처럼 묶지 않고도 한데 잘 묶여 무임승차로 오가는 바람이 많다.
운임표 중에
서울의 청량리도 보인다. 있으나마나
공연히 보인다. 면面도 연緣도 통하는 것 없다. 다만 한
땅내 안쪽으로 지금은 가을, 바람이 많다.
ㅡ 선, 시집 (적막소리)에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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