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치 / 고영민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 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 내는 것
어스름녘,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공전
자면서 그대가 나에게 다리를 올려놓는 시간 내가 이불을 당겨 그대의
배를 덮어주는 시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는 시간
밤새 무거운 머리를 들고 있는 베게처럼, 읽다가 머리맡에 엎어놓은 책처럼
죽은 그대가 뜬눈으로 내 옆에 일 년을 앉아 있는 시간
자다말고 일어나 그대가 몇 모금 목을 축이는 시간
습관처럼 자는 척하는 시간
또 저물듯 시간이 몸을 지나가고
구들이 식고
그대 잠 속으로 다시 천천히 숨어드는 시간
문득 내 살던 집의 팽나무가 보고 싶은 시간 병든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주는 시간 산란을 위해 옴두꺼비가 느리게 국도를 건너는 시간
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간 이유 없이 등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공기가 빙긋이 웃는 시간
지구가 천천히 돌아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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