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 냉장고
ㅡ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가르릉거린다 더
듬이 같은 푸른 털은 공중을 잡아당긴다 부유하던 얼굴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
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
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
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
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
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 열고 타박
타박 걸어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
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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