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 김소연

주선화 2023. 4. 8. 09:06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김소연

 

 

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릴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 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멍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오늘도 실패했구나 생각하며 경련이 이는

얼굴, 빗물받이처럼 두 귀가

쇠구슬 같은 눈물을 모으는

얼굴, 보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통과되고

있는 얼굴. 골똘히 잠든 얼굴, 약간의 근육운동이 약간의 희로애락이

미미하게 정차하다 떠나는

얼굴, 뒤통수 뒤로 숨는 얼굴

머리카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얼굴

입을 약간 벌려 말을 거는 얼굴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면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숨을 뱉는

얼굴,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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