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만한 물가
-육호수
당신과 개울을 건너다 나는 알아버렸지. 살아서
건너야 할 개울이 이렇게 깊을 리 없다고. 그러나
당신이 앞으로, 앞으로 가자고 했으므로, 나는
앞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당신은 이곳으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당신이 험한 곳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닿지 않았다. 당신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만 향했으므로, 나는 혼자 돌아왔다.
돌아가고자 했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나를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며 당신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배웅했다. 배웅하고자 했으나
눈과 코와 입이 막혀 하지 못했다.
개울을 건너 당신은 돌아왔다. "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당신이 말할 때, 나는
알아버렸지. 산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우리가 쉴민한 물가를 떠나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가 건너편으로
옮기자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알리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당신과 나의 사이가
깊어서 누구도 살아서 그 사이를 건너지 못할
거라고. 나는 가고 있다. 발이 닿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 두려웠다,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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