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주선화 2024. 12. 15. 08:54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 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뜬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샐 생각일랑아예

접어둘 것

 

그렇고말고 오늘처럼 과달키비르강(江)이 소리 없이

강물 수위를 높이며 시종일관

침묵을 고집할 때

리스본의 매력은 무섭도록

관능적일 수 밖에

 

달콤한 밤공기가 맨발의 우리들을 달빛젖도록 사주할 테니

그래, 우리 몰도바를 향해 출발하는

배를 기다리는 척

 

남은 생애를 몽땅 대책 없는 리스본의 창가에서 어기적거리다가

옹골차게 우량한 쌍둥이들이나 뭉텅뭉텅 낳게 된들 누가 어쩌랴

 

리스본까지만, 제발 더 멀리 떠나서 탈이 될

헌책방의 책들일랑

뚜껑 닫아버리고

 

오늘 밤엔 리스본까지만, 리스본의 품 안에 안겨서

오늘밤은 리스본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 한혜영  (2) 2024.12.21
돼지와 비 / 김륭  (0) 2024.12.16
이별 메뉴 (외 1편) / 도복희  (1) 2024.12.09
한파주의보 / 박기원  (0) 2024.11.29
눈사람의 시간 / 한정원  (0) 2024.11.26